역사(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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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팽창이 가로막힌 아인잘루트 전투
몽골의 이슬람 세력에 대한 공격이 시작된후, 통일되지 않고 분열되어 있던 이슬람은 완전히 박살나게 됩니다. 그나마 이전의 약해진 국가에서 다시 정신을 차리고 있던 아바스 왕조는 1260년 몽골의 침입을 받아 수도였던 바그다드가 함락되며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하고 도시가 완전히 파괴되는 굴욕을 겪었습니다. 약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이슬람의 정신적 지주였던 아바스왕조는 완전히 멸망했고, 그로인해 훌라구가 이끈 원정군은 곳곳을 공략하며 중동지역을 완전히 초토화시켰습니다. 지금의 이라크 지역은 완전히 훌라구의 손에 넘어갔고, 시리아 일대를 공격하면서 이집트에 남은 이슬람의 마지막 세력인 맘루크 왕조와 결전이 남은 상황에서 갑자기 반전이 일어납니다. 몽골제국의 칸이었던 몽케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송나라를 공격중이었..
2024.03.26 -
당나라 중흥의 기틀을 마련한 헌종
당 현종이 재위하던 개원, 천보 연간에는 당나라가 번영의 절정을 달렸습니다. 점점 현종이 며느리였던 양옥환과 놀아나며 정치를 멀리했고, 이 빈곳을 간신들이 치고들어와 권력을 농단하기 시작하면서 당나라의 비극이 시작됩니다. 결국 터진 안록산의 반란으로 당나라는 하북지역과 낙양을 빼앗기고 여러 명장들이 탄핵을 당해 죽어나가는등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이후 안록산이 죽고 그의 부하인 사사명이 이어받아 8년간 지속된 반란은 결국 이민족인 위구르의 힘을 빌려 낙양을 탈환하고 사사명의 아들 사조의를 죽임으로써 끝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수많은 백성들이 위구르에 포로로 끌려가거나 죽는등 당나라의 핵심지역에 큰 타격을 입히게 되었습니다. 이후 현종의 뒤를 이은 숙종은 이런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고 아버지인 현종을 견제..
2024.03.24 -
추악한 찬탈자에서 명군으로 거듭난 요한네스 치미스케스
동로마제국은 동쪽에서 일어난 이슬람 세력에 밀려 동방지역의 중요한 영토를 모두 잃었습니다. 특히 제국을 먹여살리던 이집트와 북아프리카 일대를 모두 잃어버리고 수세로 몰리면서 수도인 콘스탄니노폴리스까지 여러번 포위당하는 위기를 겪었지만, 가까스로 수도를 지키는데 성공했고 이후에는 오히려 반격을 가해 잃어버린 동방영토를 되찾는 중이었습니다. 니케포루스 2세는 사라센의 학살자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이슬람과의 전쟁에서 뛰어난 전공을 올렸고, 그로인해 군부의 추대를 받아 동로마제국의 황제까지 된 인물입니다. 하지만 전쟁에서의 뛰어난 지휘능력과는 달리 내치와 외교에서는 실수를 거듭했고, 결국 이것이 그의 파멸을 이끌고 말았습니다. 요한네스 치미스케스는 925년경 귀족가문의 자제로 태어났습니다. 전쟁이 거듭되던 시..
2024.03.22 -
장렬한 최후를 맞은 송나라의 마지막 애산전투
5년여간 몽골군의 포위당한 송나라의 중요한 요새인 양양성은 끝까지 저항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양양성과 인접하여 수비의 중요한 곳이던 번성에 공격을 집중해 결국 함락시킨 몽골군은 서역에서 가져온 대포로 견고한 양양성벽을 공격해 무너뜨리고 있었고, 각지에서 올라오던 송나라군의 증원과 물자공급을 차단하며 결국 1273년 1월 양양을 지키던 여문환은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송나라의 방어선은 뻥 뚫리고 말았고, 이전에 그나마 가지고 있던 정예병 13만을 동원하여 몽골군과 한판 승부를 벌였지만 수장이었던 가사도의 오판으로 전멸당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송나라의 수도였던 임안은 함락되고 황제이던 공제는 포로가 되어 북방으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송나라는 사실상 멸망하고 말았지만, 아직 나라의 패망을..
2024.03.17 -
역사에 신비롭게 등장했다가 사라진 거란
우리역사와 거란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거란의 역사를 기록한 요사에서는 거란의 본류를 조선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조선의 옛 땅에서 전통과 풍속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다는 기록을 남길 정도로 우리 한민족의 한 일파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거란은 우리민족이 세운 국가들과 합치지 못하고 반목을 거듭하고 말았습니다. 광개토태왕이 거란의 일파로 추정되는 서북쪽의 비려를 정복하면서 수많은 포로들과 양, 소떼를 끌고왔다는 기록이 광개토태왕릉비에 보이며 고구려와 거란의 계속되는 싸움으로 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갔다는 기록을 보면 거란과 우리민족이 치열하게 다투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당과 신라의 공격으로 고구려가 무너진후, 거란은 고구려의 통제에서 벗어나 세력을 키워 당나라에 침입해 약탈하고 강력했던 위구르까..
2024.03.14 -
명나라 말기 탐관오리에서 민족영웅이 된 주대전
남송은 문치주의를 표방한 국가답게 사대부에 대한 대우가 좋은 국가였습니다. 그래서인지 남송이 몽골에 의해 멸망할때도 끝까지 국가를 따라 죽은 사대부들이 많았고, 특히 송나라에 천하를 양보하고 물러난 시씨집안 사람들까지 송나라의 마지막 전투인 애산전투까지 따라가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훗날 이 사건에 대한 기록에서는 이것이 사대부를 잘 대우해준 송나라에 대한 마지막 보답이었으며, 문관위주의 정치가 거둔 유종의 미라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명나라가 멸망하던 시기에는 유독 국가와 민족을 저버리는 반역자들이 많이 나오게 됩니다. 분명 비슷한 역사를 걸었고, 북방에서 쳐들어온 군대를 막지못해 국가가 멸망했다는 점에서 남송과 남명의 공통점이 보이는데도 이전과는 달리 자신의 출세..
2024.0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