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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성에서 '극일'을 생각하다 - 오마이뉴스 (ohmynews.com)

 

남원성에서 '극일'을 생각하다

정유재란(1597) 8월13일부터 16일까지 남원성 전투 이야기

www.ohmynews.com

한국교육신문 (hangyo.com)

 

정유재란 결전지 남원성에 서다

전라북도 남원. 예부터 군사적 천연의 요새지대로 알려진 교룡산이 있고, 지리산 맑은 물이 흘러 서남부의 섬진강으로 유입되는 곳. 그리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7년여의 전쟁을 통틀어 가장 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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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다뤄본 황석산성 전투와 비슷하게 일어난 정유재란 당시의 남원성 전투에 대해 서술해보고자 합니다.

정유년 다시 침공한 왜의 좌군은 우키타 히데이에와 고니시 유키나가 등 기라성같은 장수들이 이끄는 정예부대였고, 남원성 안에서 수비하는 군사는 명나라가 파병한 3천 군사와 함께 전라병사 이복남 장군 휘하 조선군 5천명이 전부였습니다. 

 

단순 비교해봐도 왜군과 조선, 명 연합군은 비교가 되지 않을정도의 군세였지만 남원성 안에 남은 군사들과 성민들은 왜군에 맞서 싸웠습니다. 

8월 13일부터 벌어진 전투에서 잘 싸우긴 했지만 점점 밀리기 시작했고, 결국 16일에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성안에 있던 명군과 조선군, 그리고 남원성민들 전부 왜군에게 학살당했다고 합니다.

성안에 있던 전라병사 이복남은 웅치전투에서도 왜군을 물리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끝까지 항전하였지만 결국 압도적인 병력의 차이 때문에 화약고에 불을 붙여 순사했다고 전해집니다.

 

결국 전투가 끝나고 돌아온 사람들이 성내에 있는 시신을 모두 모아보니 만여구 정도 되었고, 이들을 모아 남원의 만인의총으로 집단장사를 지내게 됩니다.

이때 왜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인의 코와 귀를 베어오라는 명령을 내려 베어간 코와 귀로 이들은 교토 시내에 귀무덤을 만들어 놓았더군요. 우리가 이 무덤에 모셔진 코와 귀를 반환하라는 요청을 해도 들은척도 하지 않는 이유는 아마 자신들의 조상이 그런 잔혹한 짓을 했다는걸 더이상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일듯 합니다.

 

결국 만여명이 넘는 사상자를 낳은 남원성 전투는 알면 알수록 안타까운 사건입니다.

남원성 북쪽에 위치한 교룡산성은 워낙 험준한 지형 덕분에 천혜의 요새지만 당시 남원에 파견된 명나라 부총병 양원이 평지에 위치한 남원성에서의 싸움을 고집하였기 때문에 이런 사건이 생긴것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현지인들의 말을 들어보면 교룡산은 워낙 험준한 곳이라 그냥 산을 오르기만 해도 지치는 그런 곳인데도 이런곳을 버리고 평시에 왜구 등을 막기위해 축조되어 성벽도 낮은 남원성에서 농성한다는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교룡산성에서 수성전을 펼쳤다면 함락시키기 어려웠을 것이고, 앞서 살펴본 황석산성의 예처럼 만약 이들이 지키지 못하고 함락되더라도 엄청난 왜군의 피해가 있었을텐데 그런 가치를 살피지 못한 양원의 책임이 크다고 봅니다.

 

또한 당시 도원수였던 권율은 남원 외곽에서 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있었지만 막상 남원이 포위되자 이를 구원하지 않고 피해버립니다. 진주성이 함락될때도 전투를 피했던 권율이기 때문에 이때도 자신의 병력을 보존할 목적으로 구원하지 않았나 추측되지만 다시 생각해봐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또한 전주에 주둔해있던 명나라 장수 진우충도 남원을 구원하지 않았고, 오히려 남원이 함락되자 전주에서 도망가버려 왜군은 전주성에 무혈입성하게 됩니다.

 

결국 남원성 전투는 총사령관이었던 명나라 부총병 양원의 쓸데없는 고집으로 죽지 않아도 될 조선군과 명군들이 죽었고, 또한 억울하게 만명 가까운 남원성민들의 목숨마저 희생되었을 뿐만 아니라 왜군에세 남원의 곡식까지 내주게 되어 식량문제를 해결하게 해준 아주 안타까운 전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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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산성전투 (naver.com)

 

황석산성전투

정유재란 때인 1597년 9월(음력 8월) 경상남도 함양에서 벌어진 전투. 1597년(선조 30) 9월 24일(음력 8월 14일)부터 9월 28일(음력 8월 18일)까지 안음현(安陰縣, 지금의 경상남도 함양)의 황석산성(黃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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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산성 백성의 전투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 (hani.co.kr)

 

황석산성 백성의 전투

곽병찬의 향원익청(香遠益淸)

www.hani.co.kr

치열했던 임진년의 전투 이후, 1597년 정유년에 왜군이 다시 쳐들어 왔습니다.

임진년에는 웅치와 이치전투에서 패해 전라도를 점령하지 못했지만 이듬해 진주성을 함락시키고 성을 허물어버려 진주에서 전라도로 가는 길이 뚫리고 맙니다.

 

하지만 명과 왜의 화의교섭이 진행되며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던 전쟁이 정유년에 다시 시작된 것입니다.

이때는 왜의 실권자 히데요시가 전라도를 점령하고 무차별 살육을 지시하면서 전라도 일대가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임진년에 조선의 배후기지로 활용되던 전라도를 파괴하면 명과의 협상에서도 좀더 유리한 입장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그런 지시를 내렸다고 합니다.

 

칠천량에서 원균이 조선수군을 시원하게 바다에 수장시키고 나서, 이제 왜군은 섬진강을 따라 전라도로 올라오게 됩니다. 그 길목에 있던 함양의 황석산성에서 전투가 일어난 것입니다.

 

조선을 공격하기 위해 좌군과 우군으로 나누어 공격하던 왜군중 황석산성을 공격한 것은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우군이었습니다. 총 8만의 왜군에 맞서 총 7천의 조선군민들이 성에서 수성전을 하게 됩니다.

이 황석산성은 험한 지세에 있어 공격이 쉽지 않은 곳이었지만, 총 길이 2.7km의 큰 성이라 이정도의 인원으로 지킨다는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웠던 것입니다.

역사서에서는 왜군이 하루만에 공략에 성공하여 조선군 500명을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는 신빙성이 떨어지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꽤 큰 규모의 성을 수비한 것은 조선군이 아니라 그 안에 있었던 민초들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8만 정예병의 공격은 계속되었고, 8월 15일부터 18일까지 치열하게 싸웠지만 결국 18일 새벽에 성이 함락되고 맙니다. 조선군민들은 한사람도 남지 않고 모두 살해당했으며 조방장 백사림은 목숨을 건져 살아남는데 성공했습니다.

워낙 생존자가 없던 싸움이라 확실히 몇명이 성안에 있었고 왜군이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었는지 알수는 없지만 당시 성안에 약 7천명 정도 조선군민들이 있었다고 하니 이들이 전부 죽은것은 맞는듯 합니다.

그렇지만 왜군도 8만 병력중에 황석산성을 지나 전주에서 북상한 병력은 2만 7천 정도였다고 하니 상당수가 황석산성 전투에서 피해를 입고 전투력이 급감했음을 알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패하여 전멸한 전투지만 히데요시가 피해를 입은 우군 장수들에게 경고성 메시지를 보낼 정도였다고 하니 결코 패전의 기억으로만 치부할수 없는 전투라고 봅니다.

워낙 왜군이 큰 피해를 입었고 그 치욕이 얼마나 깊었으면 숙종때 황석산성에서 죽은 이들을 기리기 위한 황암사를 조선을 병탄하자마자 바로 불태워버리고, 안의군을 없애고 면으로 강등시켰으며 현청을 철거해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최근에는 황석산성 전투를 재평가하기 위한 움직임이 보이고 있습니다.

그동안은 패전의 기억이라며 별로 평가하는 곳도 없었지만 이제는 별다른 저항없이 진군하던 왜의 우군에 결정적인 타격을 준 전투로 다시 주목받고 있는것입니다.

당시 누구의 명령도 없었지만 가족들과 고향을 지키기 위해 그 험준한 황석산성에서 싸우다 죽어간 우리 선조들에게 다시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혹시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진주성과 황석산성, 그리고 남원성에서 죽어간 우리 조상들을 위해 한번 직접 가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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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대왕 3년의 기록입니다.

- 3년 봄 2월에 요서에 10성을 쌓아 한나라의 군사에 대비했다.

 

이것만 보면 우리가 아는 사실과 다른 면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고구려가 한동안 지금의 집안현에 머물렀고 이후에 요동으로 진출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우리의 상식과 맞지 않는것입니다.

삼국사기는 그저 요서에 10성을 쌓았다는 간략한 기록이지만 태백일사에서는 자세히 10성의 위치와 이름까지 밝혀놓았습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의 성들은 지금의 난하를 중심으로 동서로 포진되어 있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태조왕 이전의 모본왕 시절에 고구려는 한나라의 북평, 어양, 상곡, 태원 등지를 습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고 기록에 나오는데 만약 고구려가 지금의 집안현에 있었다면 정말 엄청난 장거리를 거쳐 중국의 북부를 습격한 것이 됩니다.

하지만 지금의 난하 지방에 고구려가 있었다고 하면 굉장히 가까운 거리기 때문에 이 습격이 성공한 이유가 밝혀집니다.

 

아직 고구려 요서 10성에 대해 밝혀진 바가 없고, 그 일대 지명이 많이 바뀐 것도 고려하자면 금방 밝혀낼수 없는 문제란건 확실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잘못된 기록이라 치부하면 안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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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트릭99 2019.11.08 04:10 신고

    고구려하면 넓은땅밖에 생각이 안나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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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에서 전해지듯 단군왕검이 조선을 세운것은 한국 사학계에서도 인정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삼국유사에서 환인, 환웅, 단군으로 이어지는 역사를 말하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우리역사에서는 단군과 조선만을 얘기할뿐 환인과 환웅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을 말할때 배달민족 혹은 배달겨레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배달이라는 국호는 환웅이 나라를 세우면서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배달이라는 말이 우리 민족과 관련된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긴 합니다.

삼국유사에서는 환웅이 인간세계에 뜻을 두었으므로 환인이 천부인 세개를 주면서 인간을 교화하라면서 하늘에서 내려보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렇게 해서 내려온 환웅이 곰족과 합치면서 태어난 단군이 조선을 건국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환인과 환웅은 우리 역사가 아닐까요?

 

단군조선에 대한 기록이 부족한 현실이지만 최소한 단군의 직접적인 뿌리인 환인과 환웅에 대한 연구는 해봐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야 우리 민족의 확실한 뿌리를 알수 있고, 중국과 일본의 우리역사 왜곡에 더욱 잘 대응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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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쪼쪼남편 2019.11.05 12:04 신고

    배달이라는 국호를 사용한 단어가 있었군요
    아.. 그래서 배달의 민족이라 하는 거였네요..
    이번에 하나 또 배우고 갑니다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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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인하대 고조선 연구소에서 발표한 내용이 있습니다.

기존에 우리가 알고있던 고려 국경이 아닌 새로운 고려 국경에 대한 내용입니다.

 

출처 : http://inhainstar.com/221251235997

 

인하대발 고려 국경 연구의 새바람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은 인하대학교 고조선연구소(소장 김연성 교수님)의 놀라운 학설 내용으로 학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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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역사 수업시간에 배워오던 내용으로는 고려는 압록강을 건넌적이 없다고 배워왔습니다.

하지만 인하대 고조선연구소에서는 기존 사료들과 발굴된 유물등을 토대로 새로운 고려국경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왼쪽에 보는 기존의 익숙한 고려국경은 조선 총독부 관변학자 쓰다 소우키치가 설정한 고려 국경이며, 오른쪽이 인하대 고조선연구소에서 주장하는 고려 국경입니다.

 

요양과 심양 근처에 있는 지명이 철령인데 고려말에 철령위 설치문제로 명과 갈등을 빚었던 이유는 그쪽 철령이 고려땅이기 때문입니다. 일제의 학자 한명이 일방적으로 주장한 내용으로는 철령이 지금의 함경남도 안변이라는데 이건 전혀 말이 안되는 내용입니다. 명나라와 고려의 국경이 철령이기 때문에 영토분쟁이 일어난 것인데 명나라는 함경도에 온적도 없습니다. 겨우 함경도 땅을 가지고 만주의 여진을 지나쳐 고려와 싸운다는건 전혀 성립될수 없는 것입니다.

 

한국의 강단사학계는 지금까지 일제의 학설을 가지고 진리인듯 떠받들어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더는 그렇게 하면 안될것입니다.

하루빨리 우리 역사교과서에도 새로바뀐 고려국경이 실리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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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트릭99 2019.11.05 02:35 신고

    은근히 역사가 재밌고 시험때도 역사점수가 제일 높았는데 고려에 관련해서 이런 비밀이 있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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