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의 팽창이 가로막힌 아인잘루트 전투

2024. 3. 26. 11:49역사

반응형

몽골의 이슬람 세력에 대한 공격이 시작된후, 통일되지 않고 분열되어 있던 이슬람은 완전히 박살나게 됩니다.

그나마 이전의 약해진 국가에서 다시 정신을 차리고 있던 아바스 왕조는 1260년 몽골의 침입을 받아 수도였던 바그다드가 함락되며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하고 도시가 완전히 파괴되는 굴욕을 겪었습니다.

 

약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이슬람의 정신적 지주였던 아바스왕조는 완전히 멸망했고, 그로인해 훌라구가 이끈 원정군은 곳곳을 공략하며 중동지역을 완전히 초토화시켰습니다. 지금의 이라크 지역은 완전히 훌라구의 손에 넘어갔고, 시리아 일대를 공격하면서 이집트에 남은 이슬람의 마지막 세력인 맘루크 왕조와 결전이 남은 상황에서 갑자기 반전이 일어납니다.

몽골제국의 칸이었던 몽케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송나라를 공격중이었는데, 이쪽의 덥고 습한 기후를 이기지 못하고 고전하던 중에 조어성에서 그만 전사하고 만 것입니다.

몽케칸이 병에 걸려 사망했다는 것이 원사에 적혀있는 정설이긴 하지만, 송나라군의 공격을 받아 사망했다는 설도 있는만큼 몽골제국의 대칸이 이런 작은 성을 넘지 못하고 전사했다는 것은 큰 충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훌라구는 주력군을 이끌고 몽골로 되돌아갔습니다.

몽골은 귀족들끼리 모여 대칸을 선출하는 쿠릴타이는 굉장히 중요한 행사였기 때문에, 무패를 자랑하던 훌라구의 귀환은 잔여 이슬람 세력에 축복과도 같았습니다. 다만 주력이 빠지기는 했지만 나름 강력한 2만명 정도의 군대를 키트부카 노얀에게 맡기고 자신은 몽골로 귀환한 것입니다.

 

 

하지만 몽골군은 진군을 멈추지 않았고, 시리아의 저항군을 완전히 궤멸시킨 후에 맘루크군과 아인잘루트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곳은 성경에서도 중요하게 다루는 곳이고, 특히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유명한 장소인데 1260년 몽골과 맘루크군이 싸우게 된 것입니다.

우선 지리적인 이점을 가진 맘루크군은 몽골군과 대치하여 유리한 곳을 차지하고, 근접전으로 몽골군과 싸웠습니다.

훌라구의 주력군이 빠져나간 몽골군이었지만 상당히 강력한 전투력으로 맘루크군을 몰아붙였고, 맘루크의 좌익군을 거의 궤멸시키는 전과를 올리기는 했지만 숨겨진 주력군의 공격으로 수세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몽골군이 견디지 못하고 패주하기 시작했고, 포위된 몽골군은 소수만 달아났으며 대다수는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몽골군을 이끌던 키트부카는 사로잡혀 처형당했으며 서방원정에 나섰던 몽골의 경험많은 군사들은 거의 전사해버려 결국 몽골의 중동원정은 여기에서 가로막히고 만 것입니다.

 

이후 쿠릴타이를 마치고 페르시아로 다시 돌아온 훌라구는 다시 맘루크와 싸웠지만 패했고, 그로인해 사방으로부터 압박을 받게 됩니다.

특히 같은 몽골제국이었지만 이슬람을 믿었던 킵차크 한국이 훌라구의 일한국과 전쟁을 시작한 것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훌라구가 바그다드를 함락하고 이슬람의 정신적 지주였던 칼리파까지 죽인것에 앙심을 품은 킵차크와 본격적인 전쟁에 들어가고, 주력이 그곳을 향하는 바람에 맘루크쪽은 공격하지 못하면서 일한국은 더이상 영토를 확장하지 못했습니다.

이후 이어진 맘루크와의 전투에서 패배하며 일한국은 더이상 서쪽으로 나가지 못했고, 결국 그렇게 맘루크와 대치하다가 곧바로 쇠퇴하게 되는 결말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원래 사방에서 승승장구하던 몽골군이었지만, 아인잘루트의 대패와 더불어 베트남을 세차례나 침공했다가 결국 최종적으로 실패하고 물러났으며 야심하게 기획한 일본원정까지 실패로 돌아가면서 결국 몽골의 세계정복 계획은 좌절되고 마니 아인잘루트의 패배가 이렇게 연쇄적인 결과를 낳았다고 봐도 무방하겠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