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중흥의 기틀을 마련한 헌종

2024. 3. 24. 11:29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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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현종이 재위하던 개원, 천보 연간에는 당나라가 번영의 절정을 달렸습니다.

점점 현종이 며느리였던 양옥환과 놀아나며 정치를 멀리했고, 이 빈곳을 간신들이 치고들어와 권력을 농단하기 시작하면서 당나라의 비극이 시작됩니다.

결국 터진 안록산의 반란으로 당나라는 하북지역과 낙양을 빼앗기고 여러 명장들이 탄핵을 당해 죽어나가는등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이후 안록산이 죽고 그의 부하인 사사명이 이어받아 8년간 지속된 반란은 결국 이민족인 위구르의 힘을 빌려 낙양을 탈환하고 사사명의 아들 사조의를 죽임으로써 끝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수많은 백성들이 위구르에 포로로 끌려가거나 죽는등 당나라의 핵심지역에 큰 타격을 입히게 되었습니다.

 

 

이후 현종의 뒤를 이은 숙종은 이런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고 아버지인 현종을 견제하는데 급급했으며, 대종 시기에는 명장 곽자의가 고군분투하며 당나라가 간신히 유지되는 수준이었습니다.

대종을 이어 즉위한 덕종시기에는 각지에서 난립한 번진의 절도사들이 당나라 조정의 통제를 듣지않고 반독립세력으로 성장했으며, 덕종은 절도사들에게 쫓겨다니는 형편이었다고 합니다.

 

덕종이 죽고 그의 아들인 순종이 제위를 넘겨받았지만, 곧바로 중풍에 걸리며 제대로 된 정치를 하지 못하자 아들인 헌종이 즉위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순종은 6개월만에 환관들에게 독살되어 죽었고, 이제 완전히 헌종이 권력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헌종은 우선 조세제도를 개편합니다. 이전인 덕종시기부터 적용된 양세법을 강화하고 유지하는데 힘써 문란했던 조세제도를 정비했으며, 이로인해 당나라 조정으로 들어오는 돈이 크게 늘었고 번진들의 재정을 압박해 중앙정부로 더 많은 세금을 거두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당나라 조세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강남지방의 절도사들은 하나 둘 조정의 통제권으로 들어왔고, 이렇게 다시 확보한 재원을 바탕으로 하북일대에서 할거하던 번진들을 제압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806년 일어난 일부 절도사들의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한 헌종은 어느정도 채워진 국고를 바탕으로 번진들을 제압하기 위한 군사적 행동을 시작했습니다. 작고 약한 번진의 절도사들을 무력으로 제압한 헌종은 규모가 크고 군사력이 강대했던 번진들의 사정을 봐주지 않고 압박했으며 성덕번진에 문제가 생기자 이곳을 진압하기 위한 20만의 군대를 모아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총사령관이 환관이었고, 여러 번진에서 모은 약한 병력들이었기 때문에 이 공격은 실패하고 헌종 역시 타격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성덕번진을 제압하기 위한 전쟁에서는 실패했지만, 당조정의 실력을 확인한 각지의 절도사들이 조정에 귀순하여 당나라의 신하가 되는일이 늘어났고 헌종의 위상이 높아졌습니다.

 

이후 817년에는 조정에 강하게 맞서던 회서와 성덕번진을 토벌하는데 성공했으며, 이후에는 당 조정에 가장 반항적으로 맞서던 평로치청번진까지 공격하게 됩니다.

평로치청 번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가 이룩한 세력으로 거의 60여년간 당나라 조정의 통제를 받지 않고 자체적으로 통치해오던 곳이었는데, 결국 당나라가 이곳까지 공격하기 위해 주변의 번진들을 하나둘 제압해온 것입니다.

평로치청을 이끌던 이사도는 끝까지 맞섰지만 주변 번진들이 하나둘 이탈하는 가운데, 결국 신라군 3만까지 출병하여 치열하게 싸우다가 배신자에 의해 이사도가 살해되면서 819년 평로치청 번진이 결국 평정되었습니다.

다만 그렇게 이사도가 죽은 이후에도 이곳에 집단거주하던 고구려 유민들은 반항을 멈추지 않았고, 결국 주요 유민들이 살해당하고 집단이주를 통해 뿔뿔이 흩어진 후에야 평로치청 번진이 당나라에 대항하지 못했다고 하니 이시기 이정기가 꿈꾼 새로운 고구려유민의 국가는 사라졌던 것입니다.

 

이렇게 헌종은 국가의 조세를 정비하고, 강해진 실력을 바탕으로 각지에서 할거하던 절도사와 번진들을 제압했으며 이로인해 중앙정부의 실력을 과시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 시기를 원화중흥이라 칭하며 당나라가 다시 강해진 시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전의 대종과 덕종 시기에는 반란이 일어나 수도 장안을 버리고 이러저리 도망치며 망명정권처럼 쫓겨다닌 당나라 조정이 강력했던 예전의 모습을 되찾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평로치청 번진이 제압된 이후부터 헌종은 마음을 놓고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이미 이전부터 불로장생을 꿈꾸며 먹었던 단약의 부작용으로 정신적인 문제를 보이고 있었는데, 이것이 더욱 심해졌던 것입니다.

정신적인 문제로 신경쇠약이 심해지며 성질이 조급해지고, 쉽게 화를 내며 주변사람들을 때리는 일까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특히 큰 권력을 누리며 전임황제 순종을 죽일만큼 큰 권세를 가졌던 환관들이 주로 매를 맞고 질책을 당하는 등의 피해를 입었고, 결국 참다못한 환관들이 모여 헌종을 독살하게 되며 결국 820년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 헌종은 이전의 혼란을 수습하고 당나라 조정을 정비하여 다시 국가를 세웠다는 평가를 받을만큼 괜찮은 정치를 선보였습니다. 텅 비었던 국고를 채우고 군사를 동원해 조정의 통제를 따르지 않는 번진을 제압해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등 이전황제들과 비교되는 능력을 보여준 황제이기도 합니다.

그로인해 당나라가 바로 망하지 않고 향후 100년간 수명을 이어가는데 가장 큰 공로를 남겼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하지만 양세법으로 인해 백성들의 부담이 크게 늘었고, 평로치청 번진이 제압된 후 급속도로 마음을 놓으며 정치를 게을리하며 비판받을만한 모습 또한 보인것도 사실입니다.

환관에게 독살당하지 않았다면 더욱 오래 재위하며 달라진 모습을 보였을수도 있었겠지만, 평로치청 번진을 평정한후 바로 타락하는 모습을 보이며 결국 독살당했고 그의 아들들이 무능력하고 일찍 죽어버리는 가운데 당나라는 다시 쇠퇴하여 907년 멸망하게 되니, 헌종이 좀더 오래 재위했으면 역사는 많이 바뀌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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