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신비롭게 등장했다가 사라진 거란

2024. 3. 14. 12:11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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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역사와 거란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거란의 역사를 기록한 요사에서는 거란의 본류를 조선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조선의 옛 땅에서 전통과 풍속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다는 기록을 남길 정도로 우리 한민족의 한 일파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거란은 우리민족이 세운 국가들과 합치지 못하고 반목을 거듭하고 말았습니다.

광개토태왕이 거란의 일파로 추정되는 서북쪽의 비려를 정복하면서 수많은 포로들과 양, 소떼를 끌고왔다는 기록이 광개토태왕릉비에 보이며 고구려와 거란의 계속되는 싸움으로 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갔다는 기록을 보면 거란과 우리민족이 치열하게 다투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당과 신라의 공격으로 고구려가 무너진후, 거란은 고구려의 통제에서 벗어나 세력을 키워 당나라에 침입해 약탈하고 강력했던 위구르까지 공격하는등 위세를 떨쳤습니다.

특히 10세기무렵 등장한 야율아보기의 등장 아래 발해와 대립하면서 세력을 더욱 키워나가게 됩니다.

야율아보기와 발해의 전쟁은 조금 단순하게 취급되는 경향이 있지만, 요사에 기록된 내용을 살펴보면 야율아보기가 발해와 10여년간을 싸워 간신히 요동지방을 빼앗을수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아마 북방의 패권을 두고 기존의 패자이던 발해와 전쟁을 거듭한 것으로 보이며, 결국 926년 발해의 부여부를 점령하고 상경 용천부까지 점령하며 발해를 멸망시키고 북방의 패권을 쥐었습니다.

 

이후 중국식 왕조를 표방하고 요나라를 건국한 거란은 5대 10국의 혼란에 빠져있던 중원왕조를 압박해 연운 16주를 할양받았고, 결국 후진의 수도인 개봉까지 요나라 태종이 함락시키며 화북일대까지 손에 넣었습니다.

다만 곳곳에서 벌어진 후진의 절도사들의 항전과 약탈로 거란에게 인심이 떠나면서 철군할수밖에 없었고, 그러는 와중에 태종까지 죽게되며 거란의 전성기는 우선 막을 내렸습니다.

 

 

 

그후에는 내전이 벌어지고 잠시 쇠퇴하던 거란은 성종 치세에 다시 전성기를 맞게 됩니다.

군신으로 추앙될만큼 대외원정에서 실패하지 않았던 성종이지만 고려를 완전히 이기지 못했고, 귀주에서는 정예군이 몰살당하는 패배까지 당하기는 했지만 남쪽의 송나라를 공격해 막대한 돈과 물자를 뜯어내었고, 서쪽을 공격해 몽골과 다른 민족들을 복속시키는 거란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확보한 시기가 이때입니다.

 

그렇지만 성종이후 흥종과 도종은 무능력하고 놀기만 좋아하는 암군들이었고, 외척과 권신들이 집권하며 요나라를 망치기 시작했습니다. 요나라의 마지막 군주인 천조제는 시호도 받지 못할만큼 무능한 인물이었으며, 거란이 압박하던 여진의 공격을 받아 70만 정예병이 전투에서 사라지는등 대참패를 거듭한 끝에 요나라는 멸망의 길을 걷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역사에서 사라지는듯 했던 거란이지만, 이후에 다시 부활하게 됩니다.

서쪽으로 도망한 야율대석은 철기병을 이끌고 요나라를 다시 건국했지만 동쪽의 천조제는 여진에 사로잡히면서 요나라 본국이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더욱 서쪽으로 진출해 지금의 키르기스스탄 근처 동카라한 왕국을 빼앗아 거란의 또다른 국가인 서요가 태어난 것입니다.

다만 서요는 사방에서 공격받기 쉬운 위치에 있었고, 그렇게 이전만큼 국세를 떨치지는 못하다가 나이만족의 쿠츨루크에게 찬탈당하며 서요는 거란족이 지배하는 시기가 끝나고 말았으며 이후 몽골군이 쳐들어오자 서요의 백성들이 앞다투어 항복하는 바람에 다시 힘들게 재건한 서요는 완전히 멸망하면서 거란 또한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한편 금나라에 복속하면서 용병으로 살던 거란족들은 몽골의 침입으로 금나라가 약해지자 반란을 일으켰으며, 이 거란족들이 고려로 쫓겨내려와 강동성에 틀어박혀 농성합니다.

조충을 사령관으로 한 고려군과 몽골 연합군이 이들을 공격한 결과 힘들게 강동성을 함락시켰으며, 이때 사로잡힌 거란족들은 고려 곳곳으로 흩어져 도축과 기술에 종사하면서 살아갔다고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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