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던 고려와 여진

2024. 3. 8. 11:42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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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문종은 해동천자라는 말이 어울릴만큼 사방에서 조공을 받았으며, 고려의 최전성기를 이끄는 명군이었습니다.

다만 그의 큰아들인 순종은 몸이 약했기 때문에 즉위한지 두달만에 사망했고, 둘째아들인 선종이 즉위해 아버지 문종의 치세를 이어가는 고려의 또다른 명군이 됩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은 어렸을때부터 소갈로 고생하는 약골이었고, 선종이 즉위 10년만에 승하하자 헌종으로 즉위합니다.

고려의 해동천자가 되긴 했지만 몸이 약해 항상 누워있던 헌종은 결국 반란을 진압한 숙부 계림공에게 양위하고 말았고, 곧바로 숨을 거두며 계림공은 고려의 숙종으로 즉위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 여진족은 거란의 끊임없는 견제에도 불구하고 힘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습니다.

거란의 수탈과 분열정책으로 불만이 쌓여있던 여진은 결국 고려 중심의 세계관마저 건드리게 됩니다.

고려출신으로 알려진 김준의 후손이 통솔하는 완안부가 중심이 된 여진은 북방의 고려천하를 부정하며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려 했고, 고려의 간섭을 거부하면서 서로 충돌하게 된 것입니다.

고려가 이미 건국 초기부터 북방의 여러 민족들을 제후국으로 거느리며 송나라나 요나라와는 다른 고려만의 독자적인 천하를 구축했는데, 여진의 힘이 강해지면서 이런 고려에 도전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래서 마침 국내에 반란세력을 억누른 숙종은 여진정벌을 시도했지만, 사령관인 임간의 판단실수와 기병위주의 여진을 당해내지 못하고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여진과 화친을 맺고 이 상황을 인정하고 만 고려는 무척 자존심이 상했고, 결국 윤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별무반을 조직해 여진과 맞서기 위한 군대를 양성하기 시작합니다.

숙종은 결국 여진정벌을 마무리하지 못한채 승하했고, 뒤를 이은 예종은 아버지의 의지를 이어 17만 대군을 편성해 여진을 총공격하는 여진정벌을 단행했습니다.

 

고려의 별무반이 여진을 쳐부수고 동북쪽 국경지대를 개척한후 9성을 쌓았지만, 여진의 공격은 계속되었습니다.

고려측에서는 척준경의 활약으로 여진을 여러번 격퇴하는 전과를 올렸지만, 공험진과 갈라수에서 고려 정예군이 대패하는 등 고려측의 피해도 막심했고 여진측에서도 고려를 다시 부모의 나라로 섬기겠다는 화해의 뜻을 전하자 결국 동북 9성을 다시 되돌려주고 말았습니다.

그후 한동안은 고려에 조공을 바치는 등 자세를 낮춘 여진이었지만, 이후 거란과의 전쟁에서 천조제가 이끄는 70만의 요나라군을 격파하는등 여진의 기세를 한껏 올린 아골타는 다시 고려에 사신을 보내 형제의 맹약을 맺자는 도발을 감행합니다.

 

https://youtu.be/0Av03Z7ezUQ?si=f-HUKJCMY-3ZaTGt

 

물론 이런 서신을 받은 고려조정에서는 격렬한 반발이 일어났고, 국서를 받은후 무시하다가 1년여 뒤에 그제서야 답을 보내게 됩니다.

여진의 요청은 고려가 전혀 수용하지 않았고, 특히 여진이 일어난 땅인 하얼빈 일대는 원래 고려의 땅이라면서 여진의 제안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식의 답을 보낸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요나라와 격렬한 전투를 벌이던 여진으로써는 고려에 더이상 이런 요구를 할수 없었고, 이후 요나라 주력군을 격파하고 요나라 대부분을 점령하면서 여진의 기세를 최고조로 올리게 됩니다.

그렇게 여진은 동아시아의 큰 세력으로 거듭났고, 신라왕족의 성씨로 알려진 김씨를 국호로 채택한 금나라를 건국했습니다. 완안부를 크게 일으킨 김준의 후손들과 신라의 유민들, 그리고 거란에 의해 멸망한 발해의 유민들까지 모여 탄생한 금나라는 북방의 몽골까지 세력아래 두었습니다.

거기에 도망다니던 요나라 마지막 황제인 천조제를 사로잡고, 남쪽으로 송나라를 정벌하여 개봉을 함락시켜 막대한 재물과 천하를 다스리기 위한 온갖 서적들까지 획득하는 대국으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 금나라와 고려는 이후 군사적으로 충돌하지 않았습니다.

원래 고려영토였지만 요나라가 빼앗아 설치한 보주와 내원성 일대를 다시 고려가 공격해 차지하는 것을 묵인하는가 하면, 고려에 무신정권이 들어선 이후 절령이북과 서경일대의 40여 성을 반란으로 차지한 조위총이 이 땅을 가지고 귀순하겠다는 요청도 무시해버렸습니다.

만약 조위총의 요청이 받아들여져 금나라가 고려의 서경일대를 빼앗았다면 동녕부가 100여년 정도 일찍 시작되었겠지만 당시 금나라의 세종은 이런 요청을 묵살했고 원병또한 보내지 않았습니다.

 

결국 금나라의 송나라 정벌 이후 고려는 금나라와 사대관계를 맺긴 하지만, 고려가 무신정권으로 어려움을 겪을때에도 고려를 전혀 압박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나름 고려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장강 이남으로 밀려난 송나라는 금나라에 막대한 세폐를 바치고 평화를 구걸했지만, 고려는 그저 금나라와 사이좋게 지냈으니 윤관이래 평화롭게 지낸 여진과 고려의 관계는 특이하다고 볼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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