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싸이코패스로 의심될만한 영조

2024. 2. 29. 12:48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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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영조를 조선후기의 괜찮은 시기를 이끈 군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또한 원래 영조가 죽은후 받은 묘호는 영종이었지만, 나중인 1889년 조선이 황제국을 표방하면서 이전 6대조까지의 군주들을 황제로 추증하는 과정에서 영종이 영조라는 묘호를 다시 받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를 자세히 살펴보다보면 영조는 정말 싸이코패스가 아닐까하는 의심이 될 정도로 오락가락하면서 일관되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물론 앞선 현종과 숙종, 그리고 경종 시기에는 온갖 자연재해와 청나라에 일어난 대규모 반란사건으로 정세가 안정되지 않으면서 온전히 국내정치에 힘을 쓸수 없었지만, 나름 안정된 상황에서 즉위한 영조는 국가를 안정시키는데는 성공했지만 온갖 기행을 보여주는 이중적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특히 형이었던 경종은 몸이 약해 자주 앓아눕는 약골이었는데, 이로인해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얻을수 없다는 판단아래 이복동생인 영조를 왕세제로 임명합니다. 원래 천한 무수리의 아들로 태어난 영조는 왕통에서 배제되어야하는 방계혈족이지만, 이때는 숙종이 남긴 아들이 단 둘이었기 때문에 영조가 기회를 잡게 된 것입니다.

이미 왕세제로 책봉된 상황에서 경종이 죽기만을 바랬을 영조였지만, 생각외로 병약한 경종은 나름 건강을 챙기면서 국가를 이끌었습니다. 이전의 나약한 모습에서 좀더 군주다운 모습을 보이고 있던 시기, 몸이 좋지 않아 식사를 잘 하지 못하던 경종에게 왕세제인 영조가 생감과 게장을 올렸고 경종은 별다른 의심없이 이것을 맛있게 먹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의학에서는 게와 감을 상극의 성질을 가진 음식이라 하여 함께 먹는것을 극도로 꺼리고 있는데도 왕의 수라에 이 음식이 동시에 올라갔다는 점에서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습니다. 나중에 영조는 자신이 수라상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는 변명을 내놓았지만, 당시 여름이었던 시기에 상하기 쉬운 게장과 생감을 함께 올릴수 있었던 가장 힘있는 사람은 왕세제였던 영조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뭔가 이상하기만 합니다.

 

결국 게장과 감을 맛있게 먹은 경종은 당장 복통과 설사를 호소했고, 워낙 병치레로 약해져있던 위장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면서 급기야 죽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민간에서는 경종을 죽인것이 영조가 아닌가하는 의심을 하게 되었고, 이런 의심이 굳어져 이인좌의 난까지 발생하게 되었으며 아직도 민간에는 게와 감을 함께 먹으면 안된다는 금기까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의심을 살만한 구석이 있는 상태에서 군주가 된 영조는 이후 강력한 저항을 맞게 됩니다.

급기야 1728년 경종을 지지하던 소론과 남인 일부가 주축이 된 이인좌의 반란이 일어나게 되고, 조선의 정예병을 투입하여 결국 치열한 전투 끝에 이인좌를 죽이며 반란군은 진압됩니다. 하지만 예상외로 충청과 전라일대에서 일어난 반란군은 손쉽게 무너졌지만, 생각보다 강력한 군사력을 이끌고 경상도 일대를 장악한 반란군은 쉽게 진압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어진 포위와 전투의 패배로 경상도의 반란군들도 패색이 짙어졌고, 3개월간의 치열한 싸움끝에 이곳의 반란군들을 전부 죽이고 평정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https://youtu.be/smLB1qq--uo?si=66d-KekYr6NY-qB7

 

하지만 여기서 영조의 이상한 모습이 또다시 보입니다.

반란군의 주력은 이인좌가 이끈 충청도 방면의 군사였는데, 이들은 중앙군과 교전하다가 무너져 전부 와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상도 지역이 가장 오랫동안, 끈질기게 반항했다는 이유로 경상도 지역을 반역향으로 규정하고 차별을 실시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 역시 경상도 지역의 인재를 적극적으로 채용할수 없었으며, 가뜩이나 인재가 부족하던 조선의 중앙정계는 소수의 문벌이 장악하는 세도정치로 변질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런것 때문인지 유독 경상도만 차별하고 인재등용을 막았던 영조의 결정이 더욱 아쉬워지는 대목이 아닐수 없습니다.

 

그리고 영조는 그의 아들을 죽이는 과정에서도 이상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의 아들인 사도세자는 타고난 머리와 재질로 기대를 모았지만, 영조의 편집증적이고 이해할수 없는 성격 때문에 결국 정신질환을 얻은것으로 보이며 급기야는 궁궐을 나가 기생들과 술을 마시고 도박을 일삼으며 사람까지 함부로 죽이게 되는 등 용서받지 못할 정도까지 타락해 버렸습니다.

이런 세자의 모습은 이상하게도 딸들은 정말 좋아하고 잘해주지만 아들에게는 의심과 함께 구박을 일삼았던 영조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라고 봐야겠습니다. 결국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비참하게 죽었으며, 그나마 세자의 아들이었던 정조는 죽이지 않고 세손으로 삼아 자리를 물려주었으니 다행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인좌의 난이 평정된후 탕평책을 실시해 공정한 인사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달랐습니다.

소론이 일으킨 반란 덕분에 소론은 제 목소리를 낼수 없었고, 노론의 영향력이 커진 상황에서 정국의 주도권이 결국 노론쪽으로 넘어가버렸던 것입니다. 이렇게되면 적극적으로 영조가 소론과 남인을 등용해 균형을 맞춰야했지만, 영조는 그냥 자신을 지지하는 노론의 편을 노골적으로 들어주며 말로만 남은 탕평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이후 영조의 재위기간동안 노론이 주도하는 중앙정치가 되어버렸고, 영조가 이것을 방치하는 동안 소론과 남인은 제대로 된 정치참여를 하지 못했으니 영조가 주창한 탕평책은 허울뿐이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또한 영조는 재위기간동안 흉년이 들면 술을 금지하는 금주법을 여러번 시행했지만 정작 자신은 술을 즐겼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여러번 신하들 몰래 술을 마시다가 적발되었으며, 끝까지 술이 아닌 차라는 고집을 부렸다는 기록을 보면 과연 이시기 금주법이 효과가 있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집권 후반으로 가면서 영조는 판단력이 흐려지고 의심을 일삼았는데, 여기에서도 이상한 점들이 보입니다.

그나마 서양문물을 받아들인 청나라에 의해 천체 관측장비가 일부 들어왔는데, 태양을 살펴보는 것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넘볼수도 있는 불경한 일이라면서 관측장비를 전부 파기하고 책과 지도를 없애는등의 기행을 벌여 신하들이 안타깝게 여겼다고 합니다.

거기에 말년으로 가면 치매에 걸려 제대로 된 판단을 하기 힘들었으며, 자신이 한 말을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정도였다니 정말 은퇴할때가 되었는데도 권력을 내려놓지 못한 정치가의 모습까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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