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나라 멸망의 단초를 제공한 장종

2024. 2. 23. 11:52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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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나라 세종은 올바른 정치를 시행했기 때문에, 금나라의 최전성기를 이룩한 위대한 군주이기도 합니다.

거기에 30년 가까이 재위하면서 정치적인 안정을 이룩했고, 주변 국가들에 대한 위엄을 보인 탓에 금나라가 이시기 최강국으로써의 모습을 자랑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너무 오래 재위해서인지 그의 아들은 군주의 자리도 올라보지 못한채 죽어버렸습니다. 세종은 어쩔수 없이 손자인 완안마달갈을 황태손으로 봉해 그를 후계자로 지명했으며, 세종이 결국 1189년 승하하자 마달갈이 계승하게 되어 장종이 된 것입니다.

 

장종은 정치적인 능력이 할아버지인 세종만큼 뛰어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북방의 타타르가 금나라를 침입하는 과정에서 많은 괴로움을 겪었고, 이것을 진압하기 위해 금나라의 정규군만으로 부족한 가운데 몽골부족들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타타르와 싸웠는데 이 과정에서 몽골의 영웅 칭기즈칸이 금나라의 실체를 꿰뚫어보고 배반할 마음을 먹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세종이 이룩한 강대한 금나라를 바로 침략할 생각은 하지 못했고, 좀더 시간을 기다려 금나라가 더욱 약화될때까지 인내하면서 틈을 노린 것입니다.

 

거기에 장종은 문화적으로도 한족화를 부채질했습니다.

원래 세종이 여진문화가 사라지지 않게 여진어 사용을 장려하고 공문서에 여진문자를 쓰게 하는등 한족문화에 동화되지 않게 노력했는데, 한족문화에 깊이 심취한 장종은 오히려 한문을 장려하고 역대 왕조 황제들에게 제사를 지내며 한족국가를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보임으로써 가뜩이나 약화되기 시작한 여진의 쇠퇴를 앞당긴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미 세종시기에 상무적인 기질의 여진인들이 씨우기 싫어하고 안락한 삶을 살기 시작하면서 세종의 이런 노력이 있었던 것인데, 그런 여진족의 기질마저 없어지며 군사력이 현저히 약화되었고 그로인해 타타르와 전쟁할때 몽골인들을 용병으로 쓰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상황이 악화된 것입니다.

 

또한 장종이 사랑한 한족여인 이사아가 거의 황후와 같은 지위를 누리는 가운데, 그의 일족들이 정치에 간섭하는 일이 발생했고 그들이 전부 뇌물을 받아 챙기며 중앙정치를 어지럽혔습니다.

원래 금나라 황실은 여진 귀족여인들만 황후가 될수 있었는데, 장종시기 여진족 신하들의 반대로 한족여인이 황후가 되지 못하자 따로 책봉한 황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사아는 정치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그것이 결국 정치를 혼탁하게 만든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이렇게 금나라가 눈에 띄게 약해지자, 남송의 권신이었던 한탁주는 북벌을 계획하게 됩니다.

원래 입지가 불안정했던 한탁주였는데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가자 약해진 금나라를 공격해 자신의 입지를 완전히 굳히려는 의도로 전쟁을 일으킨 것입니다.

송나라 최고의 전투력을 보유한 정예군을 동원하여 곳곳에서 국지전을 일으켰고, 결국 1205년 총병력 45000의 군사를 이끌고 금나라와 전면전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개전 초반에는 송나라군이 연전연승하며 곳곳에서 금나라군을 밀어붙였고, 각지의 중요한 요새가 함락되면서 송나라의 북벌이 성공하는듯한 모습도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후 금나라의 주력군이 남하하여 송나라군과 치열한 전투를 펼쳤고, 여진의 철갑 중장기병들이 모여 송나라군을 요격하면서 전투의 상황이 뒤바뀌게 되었습니다.

 

특히 금나라의 명장 점할정이 이끄는 금나라군이 송나라의 공격을 수비하고 오히려 반격하여 이전에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고 자신들의 땅으로 쳐들어오는 상황이 되자 송나라 조정은 당황하게 됩니다.

거기에 사천일대에서 일어난 반란사건까지 겹쳐 송나라는 완전히 싸울 의지를 잃어버리고, 북벌을 주도한 송나라의 재상이었던 한탁주는 목이 베어져 금나라 조정에 보내지는 운명을 맞았습니다.

결국 금나라와 송나라 사이에 평화조약이 맺어지고, 송나라가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내는 선에서 싸움이 마무리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북방을 수비하던 금나라의 정예부대가 피해를 입었고, 그 빈자리를 북방민족들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채웠는데 전쟁이 끝난후 장종이 이들 용병들에게 제대로 된 보상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불만이 쌓인 북방이민족들은 금나라의 명령에도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하다가 이후 이어지는 몽골과 금나라의 전쟁에서 몽골의 편에 서서 금나라를 공격하는 결과를 낳았으니 장종의 사소한 잘못이 국가의 큰 손실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20여년간 재위하던 장종은 병에 걸려 죽음을 앞두었는데, 후계자를 지명하는 과정에서도 그의 숙부인 위소왕 영제를 지명하게 됩니다.

아들이 없었지만 후궁이 그의 아이를 임신한 상황에서 장종은 영제에게 황제를 하다가 그의 아이가 태어나면 자리를 넘겨주라는 밀약을 맺은 것입니다. 그렇게 장종은 죽었고, 위소왕 영제가 황제에 올랐지만 약속은 전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위소왕 영제가 장종이 총애하던 이사아와 아이를 임신한 후궁까지 전부 처형해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위소왕의 입지는 탄탄해졌고, 이미 약해지던 금나라는 이때부터 더욱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한편 위소왕이 금나라 황제가 되었다는 말을 사신에게 전해들은 칭기즈칸은 그자리에서 침을 뱉으며 모욕을 줄 정도였고, 이후 몽골군은 금나라를 공격해 대동부와 거용관 일대를 초토화시키며 금나라의 수도인 중도까지 포위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장종은 나름 재주있는 사람이었고, 부족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문화발전에도 힘써 금나라를 세종시기 못지않은 강국으로 유지한 군주였습니다. 하지만 중앙정치가 어지러워진 원인을 제공하여 국가쇠퇴를 막지 못한 중대한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물론 송나라의 북벌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고 막대한 세폐를 받아 국가를 지켜내긴 했지만 이후 이어지는 몽골의 침입을 예상하지 못하고 북방의 수비를 소홀히 하는등 많은 잘못 또한 저지른 군주이기도 합니다.

거기에 위소왕같은 옹졸하고 능력없는 인물에게 황제자리를 넘기면서 금나라 멸망의 큰 원인이 되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장종은 암군으로 불려도 큰 문제가 없는 군주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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