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 27. 11:29ㆍ역사
1644년 명나라가 농민반란으로 멸망하자, 청나라는 이것을 기회로 북경에 들어와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갔습니다.
하지만 당시 군주이던 순치제는 변변치않은 인물이었고, 그 뒤를 이어 즉위한 강희제가 청나라를 다시 세웠다고 할만큼 나라의 기틀을 완전히 다지게 됩니다. 특히 엄청난 기세로 일어난 내부반란을 진압하고 북방의 러시아가 남하하는것을 막았으며, 서양의 기술을 도입하여 청나라를 부강한 국가로 만든 공로가 큰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강희제는 굉장히 오랫동안 재위했고, 재위 후반부로 갈수록 국정이 문란해지고 관료들이 부패하는 경향이 생겨났습니다. 거기에 청나라의 주력군이었던 만주팔기군이 오랜 평화로 인해 전투력이 급감하고 약화되었기 때문에, 강희제의 뒤를 잇는 군주가 굉장히 중요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강희제는 아들이 30명이 넘었고, 26명이 장성하여 굉장히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원래 태자였던 윤잉은 강희제의 눈밖에 나는 행동으로 태자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대신 넷째인 윤진과 열넷째인 윤제가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황제가 되기위한 노력을 기울였는데, 윤제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원정을 떠난 사이 강희제가 죽으면서 결국 윤진을 후계자로 지목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과정에서 강희제의 유언을 윤진이 조작한게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었지만, 2013년에 발견된 강희제의 유조를 보면 윤진의 인품과 그의 아들인 홍력의 총명함을 믿는다는 내용이 있기 때문에 후계자로 낙점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황제가 된 옹정제는 바로 그의 정적인 형제들을 가택연금하고 정치적인 생명을 끊어버립니다.
물론 바로 처형할수도 있었겠지만, 그것보다는 좀더 목숨을 살려주고 수시로 사람을 보내 그들을 조롱하고 모욕감을 줌으로써 자신을 괴롭힌 형제들에 대한 울분을 풀었다고 합니다.
옹정제는 일벌레로 유명했는데, 특히 황제의 권한을 크게 강화해 사방에서 올라오는 상소를 읽어보고 그것에 대한 대답과 지시를 담은 주비를 작성해서 내려보냈습니다. 이 주비에서는 일잘하는 신하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제대로 일처리를 못하는 신하들에게는 비판과 견제의 목소리를 적어 보냈으니 정말 하루종일 일에 매달려 살았던 모양입니다.
옹정제가 12년 정도 재위했는데, 몸이 아파서 제대로 상소문을 읽어볼수 없던 시기를 제외하면 하루종일 신하들과 토론하고 상소를 읽으면서 지냈다고 하니 과로사로 사망했다는 추측이 제대로 맞는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신하들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숙청을 가했습니다.
특히 자신이 제위에 오르는데 가장 큰 공헌한 연갱요와 융과다를 제거하는 과정에서는 극도의 인내심을 발휘하면서 그들을 숙청했는데, 군사적으로 큰 공을 세운 연갱요와 외삼촌이기도 한 융과다는 너무 교만해져 옹정제의 분노를 샀기 때문에 바로 숙청해도 할말은 없어보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자신을 도와준 공신이기 때문에 최대한 그들이 자멸할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고, 결국 연갱요는 자살하고 융과다는 신분을 고려해 가택연금되는 최후를 맞고 말았습니다.
옹정제는 황제가 된 이후 부패척결에 힘썼습니다.
강희제의 재위 후반기에는 관리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패가 만연했고, 거기에 지방관들도 향신들과 결탁해 지방세를 빼돌리는 등 대부분의 관리들이 부패한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옹정제는 부패한 관리들을 통제하는데 힘썼으며 특히 부패한 관리들에게는 사정을 봐주지 않았습니다.
만약 부패혐의를 받는 신하가 있으면 재산을 몰수하는 방법으로 국고를 채웠으며, 만약 자살하더라도 주변인들이 모두 모여 그가 빼돌린 돈을 납부하게 하는 등 전혀 사정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하들에게는 옹정제가 저승사자와도 같았고, 그것 때문인지 옹정제는 역사에 폭군으로 오인받기도 한 것입니다.
거기에 명나라때의 일조편법을 이어받고 개선한 지정은제를 확립하여 조세제도를 정비하였고, 관리들의 녹봉이 너무 적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모선귀공과 양렴은 제도를 만들어 어느정도 관리들의 월급을 올려주는 결단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이런 개혁들로 인해 강희제 후반부에 텅 비었던 국고는 가득 채워졌고, 이후 아들인 건륭제가 낭비하기 전까지 굉장히 건전한 재정상태를 유지할수 있었습니다.
옹정제는 10년이 조금 넘는 재위기간동안 정말 많은 일을 해냈습니다.
강희제는 재위 초반에 공적이 집중되어 있고, 옹정의 뒤를 이은 건륭제는 긴 재위기간에 비해 업적이 많지도 않은데다 부정부패를 조장하며 오히려 청나라를 망쳤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 때문에 이 사이에 낀 옹정제가 그토록 열심히 일을 하지 않았다면 청나라가 진작 망했을지도 모른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입니다.
너무 일을 열심히 하느라 오래 살지 못한 옹정제이지만, 그래도 많은 업적과 함께 청나라 전성기를 완전히 다진 군주로 평가받기 때문에 옹정제의 12년 재위기간은 청나라의 최전성기로 봐도 무방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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