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쌍성총관부 수복과 철령위 문제

2024. 1. 3. 12:40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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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몽골과의 전쟁중에 잇따라 나타난 민족 반역자들에 의해 땅을 빼앗겼습니다.

서경과 주변 40여 성은 최탄 등이 반란을 일으켜 점령했다가 몽골에 투항하면서 직할령인 동녕부로 편입되었고, 화주 일대의 땅은 조휘와 탁청 등이 이끈 반란군에 의해 쌍성총관부가 설치되어 몽골에 넘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고려가 그 일대의 땅을 잃은지 99년이 되는해에, 고려의 새로운 군주가 된 공민왕에 의해 고토수복전쟁이 시작됩니다.

우선 공민왕은 1356년 인당을 서북면병마사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 서쪽의 8참을 공격하게 하였으며, 유인우를 동북면병마사로 삼아 쌍성총관부를 공격해 고려의 영토로 회복했습니다.

 

쌍성총관부는 이때 고려의 영토로 돌아왔지만, 생각보다 이 문제는 간단해보이지 않습니다.

이후 고려의 영토로 돌아온 후에도 대륙을 집어삼킨 명나라가 이전 원나라의 판도를 회복하겠다면서 고려에 철령위 설치를 통보하고 일방적으로 영토를 접수하겠다는 통보를 해온것입니다.

그러자 고려의 우왕과 장수들은 명나라를 무력으로 정벌하고자 요동정벌군을 편성하여 북상시켰지만, 도중에 이성계가 배신하고 군사를 돌려 고려를 접수함으로써 결국 고려왕조가 문을 닫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결국 고려를 이은 조선에 이르러서 명나라와의 국경은 철령이남의 연산관부터 동북의 공험진과 선춘령 일대로 줄어들었으니, 고려의 요동정벌군이 도중에 회군한것이 무척 아쉬울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명나라가 접수하겠다는 철령을 지금의 함경남도 지역으로 알고있습니다.

이것은 대일항쟁기 일본 관변사학자들의 주장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한 것으로, 전혀 근거가 없이 철령이라는 지명을 가지고 이곳이 명나라가 주장한 철령이라고 단정지어 버린것입니다.

그렇지만 만약 이곳이 명나라가 내놓으라고 한 철령이라고 해도 그렇다면 고려는 군사를 이곳 함경도로 보내야 하는데, 굳이 전 병력을 모아 요동지역으로 보낼 이유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특히 분명 공민왕의 북벌단행시에 인당이 압록강을 건너 공격했고, 이후 이어진 정벌에서도 이성계가 오라산성과 여러 주요 성들을 공략해 결국 요양과 심양 일대까지 전부 수복했다는 기록이 있는만큼 당시 고려의 세력은 지금의 요녕성 일대까지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명나라가 심양 이남에 있는 철령까지의 영토를 접수하겠다는 통보를 해오자 고려가 반발한 것이며, 이곳으로 군대를 보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지 절대 함경남도 일대의 철령이 철령위와 관련된 곳이 아닙니다.

 

명사 지리지에서는 철령 서쪽에는 요하(遼河)가 있고 남쪽에 범하(汎河)가 있다. 또 남쪽에 소청하(小河)가 있는데, 모두 요하로 흘러들어간다. 라면서철령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명나라의 인식에서도 철령은 요하 근처이고, 요동지역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함경도에 있는 철령과는 연관이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 우왕 역시 정벌군을 편성하면서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항의하기를, 요동 함주로 부근 심주에 쌍성현이 있고 철령은 왕경으로부터 300리이며 공험진을 경계로 삼은지 오래되었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고려의 반발과 전쟁까지 불사하는 모습을 보고, 명나라는 1393년 철령위를 철령 북쪽의 은주시로 옮겨 설치하고 이곳에 조선과의 국경을 설정했습니다.

명사 지리지에서는 이 철령위를 두고 봉집현이 있고, 이곳이 옛 철령성으로써 고려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가 바로 폐지되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심양 북쪽에 남아있는 봉집보유지에는 비석까지 들어서 있으며, 이곳이 바로 명과 조선의 국경이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는데도 왜 우리는 아직도 조상들의 영토를 반도 안으로만 줄여서 가르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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