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말기 탐관오리에서 민족영웅이 된 주대전

2024. 3. 10. 11:45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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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송은 문치주의를 표방한 국가답게 사대부에 대한 대우가 좋은 국가였습니다.

그래서인지 남송이 몽골에 의해 멸망할때도 끝까지 국가를 따라 죽은 사대부들이 많았고, 특히 송나라에 천하를 양보하고 물러난 시씨집안 사람들까지 송나라의 마지막 전투인 애산전투까지 따라가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훗날 이 사건에 대한 기록에서는 이것이 사대부를 잘 대우해준 송나라에 대한 마지막 보답이었으며, 문관위주의 정치가 거둔 유종의 미라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명나라가 멸망하던 시기에는 유독 국가와 민족을 저버리는 반역자들이 많이 나오게 됩니다.

분명 비슷한 역사를 걸었고, 북방에서 쳐들어온 군대를 막지못해 국가가 멸망했다는 점에서 남송과 남명의 공통점이 보이는데도 이전과는 달리 자신의 출세를 위해 국가와 민족을 배신하는 인간들이 많았다는 점은 명나라 역사의 비극입니다.

 

이런 결과는 어찌보면 예견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은 평민출신으로서 일찍부터 관리들의 혹독한 수탈에 시달렸고, 결국 반란을 일으켜 모든것을 뒤엎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 입지전적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관료집단에 대한 불신이 컸던 주원장은 관리들의 봉급 자체를 거의 최저수준으로 책정하고 감시했으며, 이런 상황에서 봉급만으로는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만큼 생활고에 시달리던 관리들이 부정부패에 빠지게 되는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특히 명나라 말기에는 북방의 청나라와 싸우고 몽골족을 방어하느라 백성의 부담이 가중되던 시기였습니다.

거기에 장성을 넘어 북경일대로 쳐들어오는 청나라의 만주팔기는 곳곳에서 약탈을 자행하고 부족한 일손을 보충하기 위해 막대한 포로를 잡아가는등 명나라에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한 명나라에 맞서 농민봉기가 들불처럼 일어났는데, 이런 농민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군대를 편성해야 하니 이시기 농민들은 앉아서 세금을 내다 죽던가 아니면 반란을 일으켜 정부군과 싸우던가의 선택지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곳곳에서 농민들의 부담이 더욱 늘어나던 시절에, 명나라의 주대전은 1616년 과거에 급제해 벼슬을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미 이전부터 유명한 탐관오리였으며, 호광군무로 재직하던 시절 뇌물을 받고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는 악행으로 탄핵을 받아 면직된 전적이 있는 관리였습니다.

안휘성 봉양에서 일할때에는 자신만 뇌물을 받는게 아니라 아랫사람들과 말단 관리들까지 뇌물을 받고 백성을 수탈하는 것 때문에 관리들이 모두 두둑하게 재산을 챙겼으며, 주대전은 국가보다 부유한 관리라는 평을 받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상황은 급변하여 1644년 이자성의 반란군이 수도 북경을 함락시키고 숭정제는 자살하며 명나라가 멸망하자, 남경에 남아있던 조직들과 남쪽으로 도망친 황족들이 다시 남경에서 남명을 세웠습니다.

그러는사이 이자성의 군대를 전멸시킨 청나라군이 남하하여 남경을 함락시켰고, 무능하기 짝이없던 홍광제는 남경을 지키지도 못한채 청나라에 항복했다가 나중에 처형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청나라 만주팔기의 남하가 시작되었고, 양주를 비롯한 도시들에서 10만명이 넘는 양민들이 학살될만큼 청군은 약탈과 방화, 살인을 일삼으며 쳐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대전은 민족영웅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관리로 재직하던 시절 얻었던 막대한 재산을 털어 군사를 모으고, 북방에서 내려온 유민들을 모아 성을 수리하고 무기를 모으는 등 자신의 고향인 금화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 것입니다.

이미 이때부터 명나라를 배신하고 청나라에 투항한 친구인 완대성이 사람을 보내 이미 대세가 기울었으니 항복하라는 말을 전했지만, 그 말을 전하러 온 사람을 처형하고 금화성을 지키기 위한 준비를 하게 됩니다.

 

1646년부터 청나라군은 절강에 진입하여 주대전이 수비하고 있던 금화성을 공격하는데, 맥없이 함락되는 다른곳과는 다르게 금화성은 석달이 넘도록 함락되지 않았습니다.

이미 주대전을 믿고 모여든 사람들과 군사들로 인해 그렇게 크지 않은 금화성은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었고, 그렇게 청나라군의 공격은 효과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3개월동안 포위되어 물자를 전혀 공급받지 못했고, 대포를 동원해 성벽을 공격한 청군의 공격 덕분에 성벽은 거의 무너져 내렸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청군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패배하고 시가전이 전개되었는데, 이때도 주대전을 비롯한 명나라군은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웠으며 이런 공격덕분에 대부분의 군사들이 전사했습니다.

 

궁지에 몰린 주대전은 자신의 가족들과 아끼는 부하들을 화약고로 불러모아 불을 붙였으며, 화약에 불이 붙어 폭발해 죽는 순간까지 청군과 맞서 싸우며 장렬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주대전의 다섯 아들은 아버지 곁에서 폭사했으며, 큰손자인 주옥은 포위를 뚫고 원병을 요청하러 가다가 살해당했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며느리들과 첩은 금화성이 함락될때 모두 우물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고 하며, 이미 결혼하여 금화성 밖에 살고있던 그의 딸도 성이 함락되고 부친이 순국했다는 말을 듣자 목을 매어 자결했다고 하니 주대전 이하 모든 가족들 22명중에 살아남은 사람이 한명도 없었습니다.

 

남경이 함락되면서 남명정권이 붕괴되고, 정부군마저 없는 상태에서 배신자가 속출하던 당시 명나라에서 주대전은 끝까지 국가에 대한 절개를 지키며 순국했습니다. 이러는 과정에서 그의 가족은 전멸하고 말았고, 그렇게 이후 그의 이름은 역사에서 지워지는듯 했지만 이후 100여년이 지난후에 그를 공격해 죽게한 청나라에서는 주대전의 절개를 기려 열민이라는 시호를 내려 그의 충정을 기렸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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