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렬한 최후를 맞은 송나라의 마지막 애산전투

2024. 3. 17. 11:24역사

반응형

5년여간 몽골군의 포위당한 송나라의 중요한 요새인 양양성은 끝까지 저항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양양성과 인접하여 수비의 중요한 곳이던 번성에 공격을 집중해 결국 함락시킨 몽골군은 서역에서 가져온 대포로 견고한 양양성벽을 공격해 무너뜨리고 있었고, 각지에서 올라오던 송나라군의 증원과 물자공급을 차단하며 결국 1273년 1월 양양을 지키던 여문환은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송나라의 방어선은 뻥 뚫리고 말았고, 이전에 그나마 가지고 있던 정예병 13만을 동원하여 몽골군과 한판 승부를 벌였지만 수장이었던 가사도의 오판으로 전멸당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송나라의 수도였던 임안은 함락되고 황제이던 공제는 포로가 되어 북방으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송나라는 사실상 멸망하고 말았지만, 아직 나라의 패망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저항하는 세력들이 남아있었습니다.

 

 

특히 임안지역과 거의 모든 중요지역을 잃긴 했지만 아직 광동성일대와 광서일대의 땅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새롭게 송나라 조정을 조직하고 문천상과 육수부가 조정의 기강을 잡고 장세걸이 군사를 맡아 끝까지 저항하게 됩니다.

당시 일곱살이었던 익왕 조하를 황제로 옹립하고 각지를 떠돌면서 저항을 이어갔지만, 조하가 강행군을 버티지 못하고 병으로 죽은 후에는 그의 동생인 여섯살 위왕 조병을 황제로 받들고 다시 배를 타며 저항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곳곳에서 몽골군에 연패하며 결국 지금 홍콩과 마카오 사이의 최남단인 애산으로 모여들었고, 이곳에 요새와 궁을 건축하며 최후의 싸움을 준비하게 됩니다.

원래 수전에 약한 몽골의 약점을 노린 해상에서의 저항이었지만, 이미 항복해온 송나라의 수군들을 모아 공격해온 몽골이었기 때문에 이런 전략도 실패하고 결국 애산일대에 포위되고 만 것입니다.

 

육지에서 저항을 이어가며 항전하던 문천상이 몽골에 사로잡혔지만, 그는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절개를 지켰습니다.

문천상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편지를 보낼것을 강요했지만 이런 요구에 따르지 않자, 몽골군의 수장인 장홍범은  새로운 수군을 편성하여 애산을 공격하게 됩니다.

이 장홍범은 북방전투에서 이미 몽골에 투항해 활약중이었는데, 이때 송나라군을 이끌던 장세걸과는 친척관계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를 아끼는 마음에 항복할것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무시당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모든 준비를 마친 몽골군은 애산일대를 포위하고 총공격을 펼쳤으며, 더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송나라군은 사력을 다해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송군은 모든 배들을 묶어 더이상 물러나지 않는다는 의지를 보였고, 진흙을 발라 혹시모를 화공에 대비했습니다.

그렇게 진격해오는 몽골군을 여러차례 물리치는 쾌거를 보였지만, 애산일대를 완전히 포위하고 틀어막은 몽골군에 의해 식수와 물자가 차단되며 10만이 넘는 송나라군은 물한모금 마시지 못한채 다시 전투를 해야 했다고 합니다.

너무 목이마른 나머지 바닷물을 마시기도 했지만 결국 탈수현상으로 죽어갔으며, 마른 전투식량을 씹어가면서 몽골군에 맞섰다고 하니 다시 송나라군의 투지는 대단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최후의 공격에서는 이미 지친 송군이 몽골군이 쏘아대는 화살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나갔고, 움직일수 없는 배에 몽골군이 침투하여 송나라군을 전부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장세걸은 중군을 이끌고 도망치는것을 선택했지만, 당시 어린 황제에게 제왕의 도를 강의하고 있었던 육수부는 일곱살의 황제를 업고 바다로 뛰어들어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바다로 뛰어들때 어린 소제의 입에서 다시는 제왕의 핏줄로 태어나지 않겠다는 외마디가 나왔다고 하니, 그때 상황이 정말 급박했던 모양입니다.

 

그나마 존재하던 황제가 죽으면서 송나라의 거의 모든 수뇌부들은 자살하거나 싸우다 죽어갔고, 황제의 어머니조차 소제가 죽었다는 말을 듣자 바다로 뛰어들어 죽고말았습니다.

간신히 10만에 가까운 패잔병을 수습한 장세걸은 이미 황제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절망했으며, 그래도 남쪽으로 내려가 송나라를 재건하기 위한 노력을 하려했지만 마침 불어온 태풍에 의해 함대는 전부 파괴되고 군사들은 바다에 빠져 죽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송나라는 장렬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960년 조광윤이 후주를 찬탈하며 시작된 송나라의 역사가 1279년을 마지막으로 끝나게 된 것입니다.

 

이 애산전투는 정말 여러가지 의미를 남겼습니다.

비록 송나라는 패망하고 몽골에 영토를 넘겼지만,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저항하는 모습을 통해 몽골인들을 완전히 질리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특히 마지막까지 10만이 넘는 인원이 항복하는 사람없이 바다에 빠져 절개를 지켰으며, 흔히 문약한 이미지로 남아있던 송나라 답지않게 마지막을 인상깊게 마무리한 것입니다.

거기에 송나라를 따르던 사대부들 대다수도 역시 자결하거나 전투에서 죽으며 송나라의 은혜를 갚았으며, 특히 송나라에 권력을 내주고 밀려난 후주의 시씨가문 역시 송나라를 위해 전부 죽었다고 하니 사대부를 우대한 송나라가 거둔 유종의 미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입니다.

 

다만 이 전투에서 극소수의 사람들이 살아남았는데, 그 사람중 한명이 훗날 명나라를 건국한는 주원장이라고 합니다.

주원장의 외조부가 이때 애산전투에서 간신히 생존한후 그의 후손이 결국 몽골을 물리치고 다시 한족의 국가를 건국하게 되었다는 내용이 명사에 실려있으니, 이 애산전투로 송나라가 멸망하기는 했지만 훗날을 위한 초석이 되었다는 점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