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중기의 역사를 완전히 바꾸어놓은 곽자의

2024. 4. 7. 12:24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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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를 찬탈한 무측천은 자신을 유일무이한 여황제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당나라가 망하고 무측천의 주나라가 들어섰지만, 결국 당나라 종실들의 반격으로 당나라가 다시 부활하게 되었고 그 뒤를 이어 우리에게도 유명한 당 현종이 즉위하면서 또한번의 전성기를 맞게 됩니다.

이렇게 개원의 치라고 불리는 당나라의 전성기는 사실 인구가 많이 늘고 국력이 강해지기는 했지만, 그동안 쌓여있던 불만과 불합리적인 일들이 터져나오던 시기였습니다. 특히 현종이 믿고 북방의 수비를 맡긴 안록산이 궁지에 몰려 반란을 일으키게 되면서, 그동안 조용이 살고있던 곽자의의 인생도 완전히 뒤바뀌게 된 것입니다.

 

곽자의의 가문은 원래 무관이 아닌 문관집안이라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 곽경지는 다섯개의 주 자사를 역임한 관리출신이었고, 그의 조상들 역시 문관으로서 벼슬하던 사람들이라고 하니 갑자기 튀어나온 곽자의의 존재는 이상해 보이기도 합니다.

안록산의 난이 터지던 755년은 곽자의가 59세가 되던 시기로, 그때까지 별 주목을 받지 못하면서 그저그런 관리였던 그는 이때부터 완전히 달라진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그의 상관의 공석을 채우며 삭방절도사가 된 곽자의는 안록산군을 대파했으며, 당나라가 잃어버린 여러곳의 영토까지 회복하며 반란군을 밀어붙였습니다. 특히 그와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명장으로 이름높던 이광필을 장수로 추천하여 반란군과 싸웠으며, 안록산의 부하중에 가장 전투력이 높고 용감한 사사명의 군대를 격파했습니다.

이후 다시 군사를 모아 도전해온 사사명을 또다시 대패시켜 이름을 높였으며, 사사명군을 완전히 포위하고 지치게 하여 5만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아 사사명을 혼자 도망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당시 재상이던 양국충의 오판으로 당나라의 수도 장안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동관이 돌파당하고 현종은 사천지역으로 도망쳤으며, 수도인 장안은 안록산의 손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아마 이광필과 곽자의가 이때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안록산과 싸웠으면 승산이 있었겠지만, 당시 현종의 아들인 태자가 즉위하며 숙종이 되었고 이를 호위하기 위해 반란군을 두고 움직이게 되면서 사사명은 완전히 기력을 회복하게 됩니다.

 

757년 군사를 재정비한 곽자의는 반란군을 도처에서 격파하며 황하 이북의 하동지역을 다시 탈환했습니다.

반란군 내에서도 내분이 일어나 안록산은 자신의 아들인 안경서에게 죽음을 당한 상태였는데, 하동지역을 탈환하기 위해 진군해온 안경서를 곽자의가 크게 깨뜨리며 기세를 올렸습니다.

이해 4월에는 빼앗긴 장안과 낙양을 되찾기 위한 전투를 시작했고, 회흘과 아랍지역의 용병들까지 참여한 연합군을 이끌고 곽자의가 출전하게 됩니다. 장안 일대에서 반란군에 패하기는 했지만 전투는 당나라에 유리하게 펼쳐져 결국 장안과 낙양을 당나라가 되찾게 되었습니다.

 

패전하여 업에 틀어박혀 항전하던 안경서를 60만에 이르는 당나라와 이민족 연합군이 공격했지만, 안록산의 부하였던 사사명이 이를 구원하여 연합군을 대패시키고 반란을 이어가게 된 것입니다.

이후 안경서는 사사명에게 제거되었고, 이제 반란은 사사명이 이어가게 됩니다. 

이때의 패배로 인해 곽자의는 강등되었고, 숙종의 총애를 받던 환관 어조은의 탄핵을 받아 수도 장안에 머무르며 시간만 보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원기를 회복한 사사명의 군대는 강했고, 힘들게 되찾은 낙양이 다시 함락되면서 위기를 맞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762년 곽자의를 다시 부원수로 삼아 하동일대의 군대를 정비하게 했으며, 당나라 조정이 끌어들인 회흘 군대에 의해 낙양일대의 모든 재물과 포로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낙양을 탈환하고 사사명의 뒤를 이은 사조의를 격파하면서 결국 안록산과 사사명의 난이 끝나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 숙종이 죽고 대종이 그 뒤를 이었는데, 대종의 총애를 받던 환관 정원진의 미움을 사서 탄핵당하게 됩니다. 거듭되는 참소와 탄핵으로 곽자의는 숨죽인듯 1년간 숨어살아야 했으며 그렇게 생을 마감할듯 보였습니다.

 

 

그렇지만 763년 토번이 대대적으로 당나라에 침입하면서 곽자의는 다시 전면에 나서게 됩니다.

다만 당나라 조정과 황제의 견제로 제대로 된 군대도 없었으며, 그저 20여기의 기병만 이끌고 다닐 뿐이었습니다.

이해 10월 결국 20만에 이르는 토번군은 장안을 점령하고 약탈했으며 수도를 버리고 도망친 대종은 섬주 일대에서 버틸 뿐이었는데, 곽자의가 간신히 모은 4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장안을 공격하자 곽자의의 명성을 들은 토번군은 막대한 물자와 포로를 데리고 귀환했으며 이로인해 곽자의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1년후인 764년에는 안록산과 사사명의 난을 곽자의와 함께 진압한 명장인 복고회은의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이미 이전부터 이민족인 복고회은에 대한 견제를 하고 있던 당나라조정은 곽자의를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토벌하게 했으며, 토번과 위구르까지 끌어들인 복고회은과 맞서게 됩니다.

하지만 갑자기 병으로 복고회은이 죽었으며 위구르의 진영에 찾아가 담판을 지은 곽자의 덕분에 위구르는 당과 화친하고 물러나게 됩니다. 홀로남은 토번은 이런 사실에 놀라 후퇴하다가 곽자의의 공격을 받고 5만명이 죽고 만명이 사로잡히는 토번사상 최대의 패전을 기록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70세의 나이로 복고회은의 반란까지 진압한 곽자의였지만, 다시 쉴수는 없었습니다.

대종은 토번에게 수도를 빼앗기도 도망쳤고, 나중에 위구르와 화친하면서 국고를 털어 그들에게 나눠줘야 했기 때문에 당나라의 체면을 완전히 땅에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곽자의를 계속 기용해 각지의 통제불능인 절도사들을 토벌하고 계속 쳐들어오는 토번을 방어하는 일을 맡기게 됩니다. 70세면 은퇴할 시기지만, 곽자의의 명성은 이때도 계속 이어지니 신기한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773년 토번은 다시 대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당나라를 공격해옵니다.

이전에 토번을 잘 막아내던 장수들도 전부 패하고 위험한 상황에서, 곽자의는 출전하여 토번을 물리치고 약탈당한 물자와 포로를 되찾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후에도 토번과 위구르를 막아내던 곽자의는 779년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그의 벼슬은 당나라에서 비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높았으며 자손들 역시 대대로 명망가로 대접받았다고 합니다.

그가 죽었을때 당나라 조정 역시 5일간 조회를 쉬며 그를 애도하였고, 그가 관장하던 군권은 세명이 나누어 관장했으며 장례비용 역시 당나라 조정에서 부담했다고 하니 그의 위세가 어느정도였는지 알수 있습니다.

 

곽자의는 당나라가 위급할때 59세의 늦은 나이로 전면에 등장했습니다.

물론 모든 전투에서 이긴것은 아니고 때로 패배할때도 있었지만, 당나라가 위험할때마다 그가 등장하여 위기를 넘겼으니 당나라 최대의 공신이라고 봐도 무방할듯 합니다.

특히 안사의 난 이후 이민족들에게 시달리던 당나라는 그가 없었다면 이민족들에 의해 멸망한 서진왕조처럼 영토를 빼앗기며 비참하게 망했을지도 모릅니다. 반란군들과 이민족들에게 당나라를 지켜낸 곽자의 덕분에 이후 당나라의 제위를 계승한 헌종같은 명군이 나와 당나라를 부흥시켰기 때문에, 곽자의의 역할은 정말 절대적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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