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로마제국의 쇠퇴를 알린 만지케르트 전투

2024. 4. 18. 11:51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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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바실리우스 2세가 죽으면서 그 다음날부터 동로마는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바실리우스 2세가 생전에 구축한 강력한 동로마 제국군은 무적의 전과를 자랑했고, 동방에서 강력한 세력을 자랑했던 아바스 제국은 이미 쇠퇴하여 동로마에 대항할 세력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동방의 초원지대에서 성장하여 서쪽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셀주크 투르크의 출현은 동로마에게 큰 타격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랍세력이 건재했다면 아예 벌어지지도 않았을 투르크와 동로마의 충돌은 이렇게 발생하고 만 것입니다.

 

이미 1048년 경에 셀주크인들이 페르시아와 조지아 일대를 석권하고 동방의 부유한 동로마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전투력을 보존하고 있던 동로마 제국군이 출동하여 셀주크군을 격파했고, 그렇게 우선적인 셀주크와 동로마의 충돌에서는 동로마제국의 승리로 마무리 됩니다.

그래도 이후에도 충돌은 계속되었고, 1054년 만지케르트 일대에서 일어난 1차 만지케르트 전투에서는 동로마제국군이 다시한번 셀주크군을 크게 물리치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렇게 동로마제국의 강력한 저항에 마주한 셀주크 투르크는 결국 남쪽으로 기수를 돌려 이라크일대와 시리아 일대로 쳐들어갔고, 셀주크에게 위험할만한 주변의 위협들을 제거하면서 동로마와의 일전을 준비했습니다.

이어진 16여년간의 소강상태를 거쳐, 다시한번 1070년에 양국은 다시한번 만지케르트 일대에서 맞닥뜨리는데, 이 전투가 동로마제국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동로마제국에서는 이전까지 국가를 통치하며 전성기를 이끈 마케도니아 왕조가 몰락하고 새로운 황제가 즉위하며 혼란의 시기를 맞았고, 그로인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며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발칸반도의 패권을 장악한 이전과는 달리 불가리아와 세르비아를 비롯한 지역들이 동로마의 통제를 거부하면서 봉기를 일으키고 있었으며 남이탈리아에 남아있던 동로마제국의 마지막 거점인 바리마저 함락되며 동로마의 이탈리아 본토에 대한 영향력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러는 상황에서 사방에서 일어나는 군사력 동원과 정치적 불안으로 인해 제국의 군비는 축소되었고, 동부 아나톨리아 지역의 군비마저 축소되어 더욱 셀주크군을 막기위한 역량이 감소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힘든상황에서 즉위한 로마누스 4세는 제국군과 용병들을 모아 동방으로 쳐들어온 셀주크군을 막기위해 친정을 감행했고, 셀주크 투르크에서 가장 유명한 군주인 알프 아르슬란은 동로마군을 궤멸시키기 위한 군대를 편성하여 맞섰습니다.

알프 아르슬란은 동로마제국군의 소규모 부대를 각개격파하면서 본대를 포위하기 시작했고, 동로마의 본대는 결국 셀주크군에 의해 포위되고 말았습니다.

포위된 제국군은 선전하면서 버티었지만 셀주크 기병의 공격을 받으며 무너졌고, 함께 진군해온 다른 부대가 만지케르트 일대로 오지 못하고 퇴각하면서 결국 완패하고 만 것입니다.

 

불리한 상황에서도 잘 버티던 우익이 먼저 무너지고, 좌익 역시 무너진후 황제가 있던 본대와 친위대까지 포위되어 싸우다가 전멸하며 황제인 로마누스 4세는 생포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셀주크의 알프 아르슬란은 로마누스를 묶은후 목을 밟는 의식을 행한후 풀어주었습니다. 이미 전쟁에서 패한 동로마의 황제를 그들이 죽일것을 알았던 것인지는 몰라도, 풀려난 로마누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갔다가 폐위당한후 두 눈을 뽑힌채 쓸쓸히 죽어가는 최후를 맞았습니다.

 

동로마군은 만지케르트에서 전사자 8천과 포로 4천의 피해를 입었으며, 힘들게 모든 군대도 흩어지는등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하지만 전통의 강국답게 바로 멸망하지 않고 그래도 버티었으며 한동안은 호각세를 유지할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제국의 인력을 충원하고 식량을 보급하던 기지인 아나톨리아 일대는 야금야금 쳐들어온 투르크인들을 막지 못하고 함락되었으며, 결국은 모든 동방영토를 상실하고 유럽지역으로 영토가 축소되어버렸습니다.

 

이로인해 동로마제국은 정예병을 모두 잃어버리고 소국으로 전락했으며, 이후 알렉시우스 콤네누스가 동로마의 황제가 되는 1081년까지 내전과 외적의 침입으로 그동안 구축한 대제국의 이미지 역시 완전히 추락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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