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굴제국을 크게 일으킨 악바르 대제

2024. 4. 14. 12:38역사

반응형

무굴제국을 건국한 바부르는 정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몽골의 피를 이어받은 티무르의 후손인 바부르는 떠돌아다니며 기반을 잡지 못하다가 기회를 보아 아프가니스탄과 북인도 일대를 점령하며 무굴제국을 건국했지만 대업을 이룬후 얼마되지 않아 병에 걸려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그 뒤를 이은 후마윤은 즉위 후에 사방으로부터의 공격을 받아 영토를 잃고 도망치며 망명생활을 이어갔는데, 그러는 과정에서 1542년 그의 아들인 악바르가 태어났고, 망명생활을 하던 아버지와 떨어져 오아시스 일대에서 자라게 됩니다.

 

결국 페르시아의 사파비왕조에게 정예병을 빌리는데 성공한 후마윤은 1555년 북인도 일대를 다시 공격해 차지했고, 그의 아들인 악바르도 아버지와 재회하며 이곳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힘들게 나라를 재건한 후마윤은 도서관에서 손에 책을 가득들고 걷다가 미끄러져 실족사하는 어이없는 죽음을 맞게 됩니다. 후마윤 역시 재능이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이 안타깝게 느껴지지만, 그로인해 악바르가 빠르게 무굴제국의 황제가 되어 통치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3세의 나이로 즉위한 악바르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아버지를 도운 명장 바이람 칸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즉위 초반에 이어진 군사작전에서 바이람 칸은 뛰어난 전략으로 적들을 격파했고, 그로인해 악바르의 지위는 탄탄해졌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정복전쟁에서 무굴제국은 각지를 점령하며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악바르가 18세가 되던 해인 1560년에는 바이람 칸의 통제를 받기 싫어한 황제의 명령에 따라 그를 전격적으로 체포하여 제거했으며, 본격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보였습니다.

 

그렇게 실권을 되찾은 악바르는 인도 중부지역을 공격해 차지했으며, 델리 서남쪽의 라지푸타나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라지푸타나의 거의 모든 군주들은 악바르에 항복했지만, 끝까지 저항하던 우다이 싱이 통치하던 치토르 요새를 넉달이 넘는 공방전을 벌여 간신히 함락시킬수 있었습니다.

격분한 악바르는 치토르 요새에 있던 군인들과 민간인들을 전부 학살해 버렸으며, 이 학살은 악바르의 큰 실책으로 남게 됩니다.

이후 란탐보르 요새까지 점령한 악바르는 라지푸타나 일대를 전부 장악했으며 북인도 일대의 정복을 완료하게 됩니다.

 

그리고 인도에서 가장 부유한 동쪽의 벵골지방도 세력에 넣었고, 서쪽의 구자라트 지방도 정벌하여 무굴의 영토로 만들었습니다. 벵골과 구자라트 지역은 무역으로 크게 번영한 곳이라 돈이 넘쳐나는 곳이었기 때문에 이로인해 무굴제국의 세수도 크게 증가하여 이후 이어지는 악바르의 내치에도 큰 보탬이 되었습니다.

이후에는 반란이 일어난 아프가니스탄 일대를 다시 공격해 장악했고, 이전에 아버지 후마윤이 페르시아에 군대를 빌리는 조건으로 할양한 칸다하르 지역도 페르시아의 쇠퇴를 틈타 다시 정복하는등 무굴제국의 영토를 크게 넓혔습니다.

 

 

그렇게 영토를 크게 확장한 악바르지만, 이어진 내치에서도 큰 성과를 보였습니다.

각지의 도로를 정비하고 동전을 발행해 제국의 경제를 하나로 묶었으며, 이전의 중구난방이었던 조세제도를 개혁해 농민들의 부담을 크게 줄이면서 국가의 수입을 많이 늘린것입니다.

 

특히 악바르가 좋은 평가를 받는것은 종교에 대한 관용정책 덕분입니다.

독실한 이슬람 신자인 악바르였고, 재위 초반에는 다른 종교에 대한 엄격한 정책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점차 재위기간이 길어지면서 다른 종교들 또한 포용하게 된 것입니다.

인도 최대의 종교인 힌두교에 대해서도 크게 탄압하지 않았고, 일부 힌두교의 정책을 채택하는등 파격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거기에 만만치않은 세력으로 떠오르던 자이나교와 시크교에 대해서도 존중하는 입장을 취했고, 그로인해 시크교는 빠르게 교세를 넓힐수 있다고 전해집니다.

 

악바르는 50년에 가까운 재위기간동안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단순히 영토를 넓히고 무굴제국을 강국으로 만들었다는 점 외에도 경제적인 개혁과 수많은 민족들과 종교가 얽힌 인도의 사정을 고려한 포용적인 종교정책을 시행하여 무굴제국의 전성기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물론 치토르 요새의 대학살 덕분에 그의 이런 관용적인 모습이 희석되긴 하지만, 그래도 악바르가 평생동안 보여준 관대한 모습 덕분에 지금도 좋은 평가를 받는듯 합니다. 

그래서인지 대부분 불행한 최후를 맞은 무굴제국의 다른 황제들보다 훨씬 안락하고 평화로운 노년을 보냈으며, 복잡했던 인도의 민족과 종교를 관용적인 태도로 존중해 북인도의 그저그런 국가였던 무굴제국을 인도 최고의 국가로 끌어올렸으니 악바르는 충분히 대제라는 칭호를 받아도 손색이 없겠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