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유민들의 끈질겼던 부흥운동

2021. 7. 17. 13:10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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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가 거란과의 전쟁에서 패해 상경성이 함락되면서 결국 나라가 멸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발해유민들은 포기하지 않고 곳곳에서 발해 부흥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정말 치열하게 나라의 광복을 위해 싸웠던 우리 조상들이지만 지금 우리 역사교과서에는 단 몇줄만 서술되어 있는 아주 비극적인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우선 거란이 발해를 대체하기 위해 세운 동단국은 발해유민들의 거센 저항을 받아 발해의 전 지역을 다스리지 못하고 일부에만 존속했습니다. 그리고 동생에게 밀려 황제가 되지 못하자 후당에 귀순해버림으로써 결국 더이상 존속하지 못하고 쫓겨나게 됩니다.

 

그 뒤를 이어 마지막 국왕인 대인선의 동생이 즉위하여 건국했다는 후발해국이 있지만 워낙 기록이 남아 있지않아 정확한 확인이 어렵긴 합니다. 우리 역사에 이름이 남아있는 발해태자 대광현도 이곳에서의 권력투쟁에서 밀려 고려로 귀순한 것이라고 하니 이 또한 우리역사의 비극입니다. 

남아있는 역량을 총동원하여 거란과 싸워도 부족한 판국에 권력투쟁으로 자신들의 힘을 깎아먹는 짓이야말로 가장 바보같은 짓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그 후에 후발해국을 이어 일어난 국가가 정안국입니다.

정안국은 발해의 귀족출신인 열만화가 건국했다고 전해지며 고려에도 사신을 보내 연대를 꾀하고, 송에도 사신을 보내 거란과 전쟁을 하게 되었을때 지원을 부탁했지만 당시 서하와 치열하게 전쟁중이던 송나라가 미처 신경쓰지 못하는 사이 거란에게 패하여 멸망했다고 봅니다.

여기서 또한 우리 역사에서 아쉬운 점입니다. 고려가 직접 거란과 국경을 맞대는 것보다 정안국을 통해 거란을 간접적으로 견제할수 있었고, 잘하면 정안국이 가지고 있었던 만주지역의 일부 땅까지 고려영토로 편입할수 있었는데 이런 기회를 고려가 잡지 못했네요. 결국 정안국 멸망 이후 고려는 거란과 국운을 건 전쟁을 하면서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되니 더욱 안타까운 점이라고 봅니다.

 

이후에는 대조영의 후손을 자처한 대연림이 1029년 흥료국을 세웠습니다.

이때는 강압적인 거란의 통치에 반기를 든 여진족까지 반란에 합류하며 규모가 상당히 컸다고 합니다.

하지만 역시 고려의 지원 거부와 함께 내부분얄까지 일어나 거란에 다시 제압되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발해 유민들은 다시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 부흥운동을 일으킵니다.

거란의 요나라가 여진에게 연전연패하며 밀리고 있을무렵 1116년 동경유수를 제거하고 요나라의 동경을 탈취한 고영창에 의해 대발해국이 건국된 것입니다. 거란군의 토벌도 물리치면서 상당히 기세를 올렸지만 칭제건원하는 과정에서 여진족과 마찰이 일어났고, 여진의 힘을 과소평가한 실수로 결국 동경성을 내주게 되면서 마지막 발해인의 복국운동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그래도 이 고영창의 봉기는 당시 발해에서 끌려온 유민들이 이 일대에서 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합니다. 이후에 고영창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여진의 우두머리인 아골타가 여진과 발해는 한 가족이라는 말로 회유하려 했을때 발해인들이 비웃었다는 사례를 보면 발해인들과 여진인들이 동등한 입장을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거란이 나중에 후진의 석경당에게 연운16주를 할양받으면서 이 일대로 많은 발해인들을 강제이주시켰다고 하는데 시간이 지나도 한족과 동화되지 않고 오히려 강한 세력을 형성했다는군요. 그 결과 마지막 봉기인 고영창의 발해국까지 세울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나중에 거란을 멸망시키고 화북까지 장악한 여진의 금나라는 이같은 발해인들을 자신들의 군사제도인 맹안모극에 편입시켜 강병으로 써먹었다고 합니다. 언제나 전쟁에 선봉에 세울만큼 강력한 전투력을 자랑하는 군대였기 때문에 그만큼 나중에는 많이 세력이 줄어들수밖에 없는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결국 발해인들을 두려워한 금나라가 산동일대로 강제이주를 시키고 나서야 한족과 동화되었다고 하는데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그저 나중에 금나라가 멸망하는 과정에서 몽골군에 의해 산동지역이 완전히 초토화되고 인구가 줄어드는 과정에서 발해인들의 명맥이 끊기게 된 것이 아닐까 추측해볼 뿐입니다.

 

나라가 망한지 200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도 발해인들의 복국을 위한 의지는 정말 대단해보입니다.

당시 강력했던 거란에 맞서 곳곳에서 자립하는 능력을 보여줬고, 여진족까지 반란에 참여시키는 통합적인 자세도 보여줬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입니다.

결국 금나라 건국 이후에는 발해인들이 자립보다는 여진의 정치에 참여하여 귀족의 지위까지 올라가게 되지만 금 희종과 해릉왕의 무자비한 숙청에 희생되기도 하고, 나중에 몽골의 침략에 싸우다가 죽기도 하는등 평탄한 삶을 살지는 못했네요. 결국 이같은 발해인들의 비극은 야율아보기를 막지못하고 상경용천부가 함락되는 그날 예견된 것인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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