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성 전투후 벌어진 끔찍한 학살

2021. 6. 1. 14:29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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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4월 14일 부산성을 함락시킨 왜군은 15일에 규모가 훨씬 큰 동래성을 포위합니다.

3천 병력으로 수비하고 있던 동래부사 송상현 장군은 길을 빌려달라는 왜군의 요구를 거절하고 전투를 치르지만 두시간도 되지 않아 동래성은 함락되고 맙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 민초들은 최후의 한명까지 왜군에게 저항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남아있는 동래성 순절도를 살펴보면 성에 난입한 왜군에게 지붕에서 기와를 던져 저항하고 있는 아녀자들과 농민들의 모습도 볼수 있습니다.

이렇게 최후까지 저항했던 탓인지, 왜군은 성을 완전히 점령한 후에 살아남은 조선군과 백성들을 모두 죽이게 됩니다.

앞서 일본의 전국시대는 성이 항복하지 않고 싸우다 점령당하면 원래 한명도 남기지 않고 몰살하는것이 그들의 습관이었다는군요. 그래서인지 앞서 함락된 부산진과 다대포에서도 모든 군민들이 몰살당하게 됩니다.

 

https://youtu.be/QuMUG0yXiQY

그동안 맹목적으로 일본을 추앙하는 세력들이 제기하는 문제는 정확한 증거가 없으니 조선에서 벌어진 학살은 실체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2005년 부산에서 지하철공사를 위해 동래성 근방을 파내려가다가, 당시 동래성의 해자로 추정되는 곳에서 집단으로 묻혀있는 인골들과 무기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시신들을 살펴보니 단순히 전투에서 죽은 사람들 뿐만 아니라, 5살 미만의 어린아이에게도 머리에 총을 쏘아 죽였을만큼 잔혹하고 끔찍했던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당시 조선인들이 일본인들보다 평균신장이 훨씬 컸기 때문에 신장을 추측해보면 거의 당시 조선인들의 평균신장과 일치하기 때문에 희생자들은 전부 조선인들이었다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연령대도 20대에서 60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신들이 나왔고, 전투에서 죽은 군인들도 해자에 넣어버렸는지 무기와 갑옷까지 이곳에서 출토되었습니다.

당시 동래성을 수비하던 군졸들은 3천여명이었고, 백성들이 거의 2만에 가까운 숫자가 성안에 있었다고 알려졌는데 동래성이 무너진 이후 왜군은 이들을 정말 남기지 않고 학살한 것입니다.

 

이미 전투의지를 상실하고 항복한 사람들을 전부 죽이는 것은 예전 북방민족들이 자주 사용하던 방식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고려가 몽골과 전쟁할때도 몽골군이 저항하던 고려인들을 전부 죽이는 방법을 사용하고는 했다는데 그런 방법이 16세기 조선에서 왜군에 의해 자행되었다는 명백한 증거가 발견되었네요.

 

이미 앞서 함락된 부산진과 다대포는 정발 장군과 윤흥신 장군이 끝까지 저항함으로써 왜군에게 절망을 안겨주었지만 그보다 규모가 훨씬 컸던 동래성은 생각보다 오래 버티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끝까지 버티었지만 중과부적으로 동래부사 송상현은 왜군에게 죽었고, 경상좌병사 이각은 그림에도 나왔듯이 성에서 도망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일본은 아직까지 자국내에 남아있는 조선인들의 코와 귀가 묻혀있는 무덤에 대해 제대로 교육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물론 그들의 입장에서도 떳떳한 행동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럴테지만 이렇게 우리땅에서 왜군에 의해 자행된 학살의 증거가 나왔는데도 물론 전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네요.

20세기에 일본군이 자행한 학살도 인정하지 않는 마당에 그들의 선조가 조선인을 집단학살한 흔적을 인정하지 않는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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