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성 전투

2021. 1. 29. 14:56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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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성에서 '극일'을 생각하다 - 오마이뉴스 (ohmynews.com)

 

남원성에서 '극일'을 생각하다

정유재란(1597) 8월13일부터 16일까지 남원성 전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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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육신문 (hangyo.com)

 

정유재란 결전지 남원성에 서다

전라북도 남원. 예부터 군사적 천연의 요새지대로 알려진 교룡산이 있고, 지리산 맑은 물이 흘러 서남부의 섬진강으로 유입되는 곳. 그리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7년여의 전쟁을 통틀어 가장 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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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다뤄본 황석산성 전투와 비슷하게 일어난 정유재란 당시의 남원성 전투에 대해 서술해보고자 합니다.

정유년 다시 침공한 왜의 좌군은 우키타 히데이에와 고니시 유키나가 등 기라성같은 장수들이 이끄는 정예부대였고, 남원성 안에서 수비하는 군사는 명나라가 파병한 3천 군사와 함께 전라병사 이복남 장군 휘하 조선군 5천명이 전부였습니다. 

 

단순 비교해봐도 왜군과 조선, 명 연합군은 비교가 되지 않을정도의 군세였지만 남원성 안에 남은 군사들과 성민들은 왜군에 맞서 싸웠습니다. 

8월 13일부터 벌어진 전투에서 잘 싸우긴 했지만 점점 밀리기 시작했고, 결국 16일에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성안에 있던 명군과 조선군, 그리고 남원성민들 전부 왜군에게 학살당했다고 합니다.

성안에 있던 전라병사 이복남은 웅치전투에서도 왜군을 물리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끝까지 항전하였지만 결국 압도적인 병력의 차이 때문에 화약고에 불을 붙여 순사했다고 전해집니다.

 

결국 전투가 끝나고 돌아온 사람들이 성내에 있는 시신을 모두 모아보니 만여구 정도 되었고, 이들을 모아 남원의 만인의총으로 집단장사를 지내게 됩니다.

이때 왜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인의 코와 귀를 베어오라는 명령을 내려 베어간 코와 귀로 이들은 교토 시내에 귀무덤을 만들어 놓았더군요. 우리가 이 무덤에 모셔진 코와 귀를 반환하라는 요청을 해도 들은척도 하지 않는 이유는 아마 자신들의 조상이 그런 잔혹한 짓을 했다는걸 더이상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일듯 합니다.

 

결국 만여명이 넘는 사상자를 낳은 남원성 전투는 알면 알수록 안타까운 사건입니다.

남원성 북쪽에 위치한 교룡산성은 워낙 험준한 지형 덕분에 천혜의 요새지만 당시 남원에 파견된 명나라 부총병 양원이 평지에 위치한 남원성에서의 싸움을 고집하였기 때문에 이런 사건이 생긴것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현지인들의 말을 들어보면 교룡산은 워낙 험준한 곳이라 그냥 산을 오르기만 해도 지치는 그런 곳인데도 이런곳을 버리고 평시에 왜구 등을 막기위해 축조되어 성벽도 낮은 남원성에서 농성한다는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교룡산성에서 수성전을 펼쳤다면 함락시키기 어려웠을 것이고, 앞서 살펴본 황석산성의 예처럼 만약 이들이 지키지 못하고 함락되더라도 엄청난 왜군의 피해가 있었을텐데 그런 가치를 살피지 못한 양원의 책임이 크다고 봅니다.

 

또한 당시 도원수였던 권율은 남원 외곽에서 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있었지만 막상 남원이 포위되자 이를 구원하지 않고 피해버립니다. 진주성이 함락될때도 전투를 피했던 권율이기 때문에 이때도 자신의 병력을 보존할 목적으로 구원하지 않았나 추측되지만 다시 생각해봐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또한 전주에 주둔해있던 명나라 장수 진우충도 남원을 구원하지 않았고, 오히려 남원이 함락되자 전주에서 도망가버려 왜군은 전주성에 무혈입성하게 됩니다.

 

결국 남원성 전투는 총사령관이었던 명나라 부총병 양원의 쓸데없는 고집으로 죽지 않아도 될 조선군과 명군들이 죽었고, 또한 억울하게 만명 가까운 남원성민들의 목숨마저 희생되었을 뿐만 아니라 왜군에세 남원의 곡식까지 내주게 되어 식량문제를 해결하게 해준 아주 안타까운 전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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