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과 양수척으로 살펴본 오래된 인종차별의 역사

2021. 11. 7. 13:07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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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우리민족을 단일민족이라고 칭하는 경우가 많은데, 막상 알고보면 우리는 한 민족으로만 구성된 집단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단군이 조선을 건국한 이후, 부여와 고구려는 북방민족을 꾸준히 흡수하면서 세력을 늘렸고, 백제와 가야같은 경우는 북방민족의 지배세력이 반도의 토착민들을 정복하면서 세력을 키웠으니 우리는 결코 단일민족은 아니라는 사실을 충분히 알수 있습니다.

 

https://youtu.be/ASTwDKLUIDk

하지만 의외로 우리 역사에서 발견할수 있는 인종차별의 모습은 비교적 쉽게 발견할수 있습니다.

또한 고려태조 왕건이 삼한을 통일할때 백제를 공격하면서 제어할수 없는 사람들이 양수척이라는 이름으로 떠돌면서 살아간 것이 고려시대부터 발견되는 양수척이라는 집단의 시작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큰 키에 푸른 눈과 빨간 머리를 가진 모습을 가진 것으로 보아 혼란한 시기에 고려로 넘어온 북방민족의 후예로 보입니다. 아마 이들이 최후까지 저항한 백제의 유민과 결합하여 탄생한 종족들을 한데 양수척이라고 부른것이 시초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런 차별은 고려뿐만 아니라 나중에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다시 통일하게 되는 명나라에도 비슷하게 존재합니다.

명태조 주원장은 명나라의 세력이 커질때까지 원나라와 싸우지 않고 주로 강남에 위치한 반원세력들과 싸우는데 집중했는데, 그중에서 최강의 세력을 자랑했던 호광의 진우량과 큰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특히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 호수인 파양호에서 서로의 운명을 건 대접전에서 가까스로 진우량을 죽이고 승기를 잡은 후에 그 아들에게도 항복을 받아 결국 장강 중류까지 주원장이 장악하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전후 처리에 대한 상반된 모습을 보이는데 진우량의 아들은 죽이지도 않았고 고려로 보내주면서 공민왕에게 잘 대해주라는 부탁까지 남겼다고 하는군요. 그렇지만 진우량을 위해 최후까지 싸웠던 호광지역의 전사들은 끝까지 용서하지 않았고 결국 배위에 가둔채 땅위에 내리지 못하게 하는 벌을 내렸고 결국 명나라가 망하는 순간까지 천민으로 떠돌며 남자는 어업에 종사하고 여자는 창기가 되어 비참하게 살다가 천하를 손에 넣은 청나라 정부에 의해 평민으로 돌아갈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차별이 고대에도 엄연히 존재한만큼, 그 부작용도 크게 나타났습니다.

나중에 고려와 몽고군이 만주에 항거하고 있던 거란족을 토벌하자 그 잔당들이 고려영토내로 쏟아져 들어왔는데 국경지대에 살고있던 양수척들이 이들의 앞잡이를 자처하며 고려를 배신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고려의 권력자이던 이의민의 아들인 이지영이 자신의 첩을 내세워 양수척들에게 과중한 공물을 강요했고, 결국 이런 불만이 고려를 배신하는 결과를 낳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고려를 이은 조선에서도 이들의 존재를 골치아프게 여겼던 모양입니다.

세종때에는 이들의 호칭을 고려시대에 일반백성을 칭하는 백정으로 바꾸면서 조선인들과 동화시키려 하였지만 결국 실패하였고, 이들은 도살업과 수공업에 종사하며 일반백성들과는 분리된 삶을 살다가 결국 조선이 일본제국에 병탄되고 동족간의 전쟁까지 일어나는 혼란한 시기에 결국 우리역사의 일원으로 동화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렇듯 우리역사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백정들을 살펴보면, 아마도 자신들의 생활습관을 고집하는 양수척과 백정들에 대한 우리 조상들의 반감도 대단했던 모양입니다. 

나중에 임진년에 명나라에서 건너왔다는 흑인용병이나 조선후기에 표류하게 되어 조선관리로 임명되었다는 네덜란드 사람들은 비록 외모는 크게 다르지만 조선의 옷을 입고 조선말을 구사하니 조선인과 다를바가 없다는 기록을 보면 우리 조상들이 생각보다 그렇게 경직된 사고방식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양수척이나 백정들은 일제 강점기까지 신분해방운동을 전개해야 할 정도로 사회적인 차별이 극심했으니 이들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나 연구가 없는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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