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2. 7. 11:38ㆍ역사
고려 태조 왕건은 알려진대로 정략결혼을 했기 때문에 그의 아들과 후손들이 많았고, 오히려 그것 때문에 이후 황제가 된 혜종과 정종은 황제가 될수 있는 이들을 견제하는데 몰두할 정도였습니다.
결국 고려 4대 황제인 광종은 황권강화에 힘을 쏟아 강력한 독재정권을 수립했고, 재위 후반에는 호족들과 함께 황족들도 피의 숙청을 시작하여 태조 왕건의 정통 핏줄을 가진 이들이 상당히 줄어들었습니다.
그 이후 즉위한 경종과 성종은 나름 치적을 남기면서 고려를 다시 어느정도 정상궤도에 올려놓았지만, 이들은 전부 너무 일찍 사망하거나 아들을 얻지 못하면서 다시 황제자리가 위협받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왕건의 여덟번째 아들인 왕욱이 아들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그 상대가 경종의 황후인 헌정황후였다는것이 문제였습니다. 이들은 서로 숙부와 조카사이의 관계였고, 또한 경종황제의 정실황후였던 헌정황후가 재가하지 않은 몸으로 왕욱과 사통하여 아들을 낳았다는것이 문제였습니다.
물론 고려왕조에서는 황실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방법으로 근친혼을 선택해 황실간 혼인이 잦았고, 그로인해 이들의 관계도 인정받을수 있었겠지만 경종의 황후라는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던 와중에 사생아를 낳았던것이 문제되어 헌정황후는 아들을 낳은후 산욕으로 사망하고, 아이의 아버지인 왕욱은 유배를 가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사생아로 태어난 아이는 그래도 태조 왕건의 직접적인 핏줄이었기 때문에, 당시 재위하던 성종은 아이를 아버지인왕욱에게 돌려보냈지만 아이가 5살 되던 해에 아버지까지 사망하며 완전한 고아가 되어버렸습니다.
성종은 아이를 대량원군으로 봉하면서 황족의 대우를 해주긴 했지만, 이후 즉위할 목종의 잠재적인 경쟁자로 여겨져 그다지 정상적인 삶을 살지는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는동안 성종이 사망하고 경종의 아들인 목종이 즉위했는데, 목종은 동성애자였다는 야사가 전해집니다.
즉위후 무난한 정책으로 괜찮은 평가를 받았던 목종이지만, 후사를 볼수 없는 자신의 상태 덕분에 일찍부터 왕욱의 아들인 대량원군을 지키는데 최선을 다합니다. 목종의 어머니인 천추태후는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후사로 만들기 위해 대량원군을 궁에서 내보내 절의 승려로 만들었으며, 끊임없이 자객을 보내 대량원군을 죽이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럴때마다 목종과 절의 주지가 대량원군을 보호했으며, 거듭되는 혼란속에 서경을 지키고 있던 강조가 정예병을 이끌고 개경에 진입해 목종과 천추태후를 폐위하고 대량원군을 황제로 옹립하여 새로운 현종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이렇게 건강하지 못한 10대 시절을 보낸 군주들은 이런 경험 덕분에 폭군이 되는 경우가 많고, 이후 삐뚤어진 정치를 펴기도 하지만 현종은 전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18세라는 어린 나이에 즉위했음에도 불구하고 북방의 여러 요새들을 수리하고 백성들을 배려한 정책을 펴는 등 즉위 초반부터 명군의 자질을 보여 많은 기대를 모았습니다.
하지만 북방의 요나라를 통치하던 성종은 전쟁에서 패한 적이 없을 정도였고, 그로인해 군신으로 추앙받을 정도였습니다. 특히 송나라를 침공하여 많은 돈과 재물을 받아내며 주도권을 잡았는데, 고려에도 침공할 명분을 찾다가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40만 대군을 이끌고 1010년 전격적으로 고려에 쳐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흥화진에서는 양규가 이끄는 고려군이 잘 버티면서 분전했지만, 이후 전투에서는 고려가 패했으며 강조가 고려의 정예병 30만을 이끌고 성종과 맞섰다가 통주에서 패하면서 고려의 방어선이 붕괴되고 맙니다.
서경을 비롯한 주요 도시들은 끝까지 요나라에 항복하지 않고 지켜냈지만, 각지로 방어역량이 흩어진 상황에서 수도인 개경까지 요나라군이 포위하게 되었고 결국 현종은 강감찬의 건의를 받아들여 남쪽으로 내려가 항전을 이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남쪽으로 내려가는 와중에 황제를 모시던 신하들이 점점 도망가기 시작했고, 각지의 지방관들도 현종을 홀대하면서 온갖 수모를 겪게 됩니다. 임진왜란때 그토록 빠르게 도망가던 선조는 그래도 신하들의 극진한 대우를 받으면서 도망칠수 있었는데, 아직 즉위 초기라서 정통성을 완전히 확립하지 못했던 현종은 생명의 위협을 받아가며 남쪽으로 내려갈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중랑장 지채문이 끝까지 소수의 호위군을 지켜가면서 현종을 모셨고, 왕건과 인연이 깊은 나주까지 내려가서야 목숨을 부지하고 조정의 기강을 세울수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고려조정은 개경이 함락되고 궁궐이 불타는 큰 피해를 입은후 현종의 입조를 조건으로 거란과 강화를 체결하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 보급로가 끊기고 후방을 위협당하던 요나라 성종이 고려의 확답을 받기도 전에 도망간 탓이 크며, 당시 사신으로 갔던 하공진만을 인질로 잡아 후퇴하고 말았습니다.
개경에 돌아온 현종은 즉시 전후 복구사업을 시작했으며, 궁궐을 고치고 도성을 정비하는것은 물론 혼자서 자신을 끝까지 지켜낸 지채문에게 큰 상을 내렸습니다. 또한 흩어진 고려의 정예군을 다시 모아 거란의 침입에 대비했으며 성종과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한 양규와 김숙흥에게도 벼슬을 내리고 가족들에게도 포상하는등 민심을 수습하는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거기에 물론 거란에만 대비하는것이 아니라 당시 준동하던 동여진에 맞서 수군을 정비하고 군선을 늘려 제해권을 잡았으며, 그로인해 동여진의 해적들은 고려를 공격하지 못하고 우산국과 일본을 공격해야 했을 정도로 고려의 위세가 대단했다고 전해집니다.
그 이후 1018년 거란의 소배압은 요나라의 정예병 10만을 이끌고 다시 고려를 침공해왔습니다.
하지만 흥화진에서의 패배를 시작으로 각지에서 고려군에 고전하게 되었고, 강감찬과 강민첨이 이끄는 20만의 고려군에게 쫓겨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이전의 침입 당시에 수도로 직접 돌격하여 함락시킨 경험이 있기 때문에 소배압은 기병을 동원해 개경으로 돌진했지만, 개경 사수의 의지를 보이며 방어에 들어간 현종의 의지를 꺾지 못하고 다시 후퇴하다가 귀주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며 거란과의 전쟁을 고려의 최종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고려가 승리하며, 요나라와 송나라 사이에 고려는 당당한 독립국가로 우뚝섰습니다.
고려의 전승행사를 송나라 개봉 한복판에서 할 정도였으며, 송나라 황제가 고려 사신에게 내려준 선물을 마음대로 처분하고 온갖 행패를 부려도 송나라에서 항의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또한 패배한 요나라 역시 고려사신이 와서 온갖 패악질을 부려도 한마디 항의는 커녕 사죄하며 돌려보냈다고 하며, 다시는 고려와 전쟁할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로 위축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거란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전후 복구사업을 통해 고려의 모든 역량을 재건한 현종은 국가제도를 정비했습니다. 전쟁중에 타버린 고려실록을 다시 편찬했고, 초조대장경을 간행했으며 천자국으로서의 과시를 위해 연등회와 팔관회를 부활시켜 고려의 위세를 다시 떨쳤습니다.
하지만 거란과의 전쟁에 너무 고생을 한 탓인지, 현종은 한창 더 일해야 할 나이인 1031년 38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명군의 자질이 있었고, 능력 또한 출중했던 현종이 더 오래 재위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그의 아들인 덕종과 정종 모두 괜찮은 군주로 평가받으니 자식교육에도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그의 손자인 문종이 재위하는 고려는 당시 동아시아 최강국의 위세를 떨치며 남방의 수많은 국가들에게 조공을 받는당당한 해동천자국으로 모두에게 인정받게 되니, 현종은 자신 뿐만 아니라 후손들도 모두 능력있는 명군들이었다는 점에서 고려를 다시 일으켜 세운 중흥군주로 인정해도 충분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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