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1. 24. 13:04ㆍ역사
요나라는 태조인 야율아보기가 북중국과 발해를 정복하며 강국으로 성장했습니다.
특히 5대 10국의 혼란기에 석경당을 후원하여 연운 16주를 할양받고, 막대한 돈을 매년 상납받는 등 동아시아의 강력한 국가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후에는 후진의 석중귀가 세폐를 거부하고 도발을 멈추지 않자, 직접 태종이 군사를 이끌고 후진의 수도인 개봉을 점령하고 화북일대를 장악했지만 곳곳에서 이어지는 저항과 통치실패로 철수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강국이 된 요나라지만, 바로 혼란에 빠졌습니다. 태종이 급사하고 뒤를 이은 세종과 목종이 암살당하는 등 혼란을 겪게 되었고, 남쪽에서는 새롭게 들어선 후주의 명군 세종이 이끄는 북벌군에 참패하고 연운 16주 중 영주와 막주를 빼앗기는 등 완전히 동네북 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나마 후주 세종이 바로 죽어버리는 바람에 2개의 주만 빼앗기는 선에서 전쟁이 마무리되었지만, 만약 세종이 죽지 않았다면 요나라가 북방의 영토를 상당부분 빼앗기고 약소국으로 전락했을 가능성도 충분해 보입니다.
후주의 뒤를 이어 들어선 송나라는 건국 초반에는 요나라와 친하게 지냈지만, 강남일대를 통일하고 중국 전체를 집어삼키면서 요나라와 전쟁을 시작합니다.
특히 나이어린 성종이 즉위하고 주변 신하들이 정사를 좌지우지하는 가운데, 이것을 노린 송나라의 선공이었던 것입니다.
1차 북벌에서 요나라의 주력군을 깨뜨리는 대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전열을 재정비한 요군에 의해 송나라는 참패를 당하고 송나라 태종은 허겁지겁 도망치는 굴욕을 맛보게 됩니다.
그 후에 이어진 2차 북벌에서도 요군은 송나라를 크게 격파하고 승리했으며, 1004년 어느정도 성장한 성종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송나라 정벌에 나섰습니다.
요나라군은 곳곳에서 송나라군을 물리치고 영토를 점령했으며, 황하 인근까지 진군하여 개봉성을 압박했지만 개봉을 점령하지는 못했고 결국 화의를 맺으며 물러났습니다. 하지만 송나라의 주력군에 큰 타격을 주었고 황하이북의 모든 거점을 점령했으며, 이때 사로잡은 막대한 포로들과 송나라로부터 평화를 대가로 받은 막대한 세폐로 인해 요나라 국력신장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성종은 요나라의 최전성기를 이끌었으며, 요녕성 요하부터 서쪽의 위구르 일대까지 점령하는 대제국을 건설하게 됩니다. 또한 제도를 정비하여 거란의 독자적인 문화를 지키고, 조세제도 역시 개혁해 명군의 면모를 보였습니다.
이렇게 성종은 요나라에서는 불패의 명장으로 떠올랐고, 곳곳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지만 유독 고려에서만큼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1010년 자신이 직접 40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려를 침공했는데, 흥화진에서 강력하게 저항하던 양규의 고려군에게 패배하고 말았고 일주일동안 포위공격했지만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흥화진의 고려군을 내버려두고 남쪽으로 내려간 성종은 강조가 이끄는 고려군 주력 20만과 교전하게 되지만, 강조가 이끄는 고려군의 분전으로 전황이 불리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명장답게 성종은 강조의 고려군을 격파하고 통주성을 포위하지만 결국 함락시키지 못한채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이후 곽주성을 함락시킨 성종은 안북부를 점령하는등 기세를 올렸고, 고려 북방의 중심인 서경을 포위합니다.
서경은 여러 장수들이 지키고 있었지만 항복하자는 의견이 많아 제대로 된 수비가 어려웠고, 그렇게 수비책임자들이 도망치며 항복하는듯 했지만 조원과 강민첨의 통솔 아래 요군을 막아낼수 있었습니다.
거기에 흥화진에 갇혀있던 양규는 정예기병을 이끌고 나와 통주성의 포위를 풀었으며, 얼마전 함락된 곽주성을 되찾고 요나라군 6천명을 죽이는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렇게 불리한 상황에 놓인 성종은 결국 고려 수도인 개경으로 진격하는 모험을 선택했고, 주력군이 궤멸당한 고려 현종은 수도를 버리고 남쪽으로 도망가게 됩니다.
성종이 개경을 접수하긴 했지만 텅빈 도시에서 할수있는것은 없었고, 결국 보급로가 끊기고 사방으로 포위된 상황에서 성종은 철수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 개경을 불지르고 보이는 건물은 전부 파괴했다고 하니, 고려 초에 세워진 건물은 이때 전부 사라졌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북쪽으로 쫓겨가는 가운데 양규와 김숙흥이 이끄는 고려군이 요군을 기습하여 괴롭혔고, 포로가 된 백성들을 구하며 퇴각하는 성종의 발을 묶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요군에 의해 포위되었고 양규와 김숙흥은 하루종일 일곱차례나 전투를 치렀으며, 활과 칼이 모두 떨어질때까지 최후의 한사람까지 항전했다고 합니다.
이때 요나라군은 피해가 막심하여 온갖 병장기와 물자를 내버린채 목숨만 건져 도망쳤다고 하며, 압록강도 간신히 건널만큼 전군에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고려에서 허겁지겁 철수한 성종은 이후 소배압과 정예병사 10만을 보내 다시 고려를 침공하지만, 이번에는 강감찬과 강민첨이 이끄는 30만 고려군에 의해 곳곳에서 패전하고 결국 귀주에서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습니다.
그 후에는 요나라의 성종도 다시는 고려를 침공하지 못할만큼 큰 패배였으며, 성종도 이 패배를 인정하고 고려와 더이상 전쟁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성종은 49년간 재위하다가 1031년 사망했는데, 그렇게 치열하게 싸웠던 고려의 현종과 강감찬도 모두 이때 사망했습니다. 고려 현종이 5월, 성종이 6월, 강감찬이 8월에 사망했다고 하니 동시대 영웅들이 같은해 모두 죽게 된 것입니다.
요나라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 성종은 일으킨 전쟁에서 큰 실패가 없었고, 오히려 연전연승하면서 패배를 모르는 거란의 군신으로 숭배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거기에 내정까지 힘쓰면서 명군으로 칭송받을 정도로 유능한 인물이었지만 유독 고려에서만큼은 힘을 제대로 쓰지 못했습니다. 물론 고려의 수도인 개경을 점령하면서 힘을 과시하긴 했지만 주요 도시들은 함락시키지 못하고 간신히 퇴각할 정도였고, 이후 벌어진 전쟁에서도 정예병을 잃어버리는 참패를 당하며 고려를 끝까지 굴복시키지 못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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