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1. 12. 12:17ㆍ역사
15세기 조선이 오랜 평화와 내부갈등으로 혼란해져 있을무렵, 일본에서는 무로마치 막부 이후로 잘게 쪼개진 지방세력들이 전쟁을 일삼는 전국시대가 지속됩니다.
이들은 농민들을 죽기 직전까지 수탈하여 전쟁을 지속했고, 그러는 와중에 일본의 무사들과 군대는 완전히 기계처럼 전쟁을 수행하는 정예부대가 되어버렸습니다. 거기에 1543년 포르투갈 상인에 의해 전해졌다는 유럽식 화승총인 철포까지 받아들이며 왜군은 주변국과 비교가 힘든 군사강국이 된 것입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전국시대를 끝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떄까지 남아돌던 군대를 이용해 조선을 전격적으로 침략했고, 총병력 15만이 넘는 병력을 조선에 쏟아부으며 대륙침략의 전초전을 시작합니다.
개전 초기에는 조선군이 잇따라 무너지며 왜군의 진군속도를 전혀 늦추지 못했고, 특히 충주에서 조선의 정예 기마병이 왜군의 조총부대를 막지 못하면서 전멸하는 와중에 수도인 한성까지 내주고 도망가게 된 것입니다.
원래 조선은 북방의 여진족을 막기 위해 기마병을 양성했고, 조선 초기부터 만들었던 화기들을 더욱 개량하고 발전시켜 화력으로 압도하는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하지만 왜군이 사용한 전법은 조총병을 셋으로 나누어 1열은 발사하고 빠진후 재장전하고, 2열은 기다리고 있다가 발사후 다시 옆으로 빠져 재장전하는 사이에 3열이 다시 등장하여 발사하고 빠지는 사이 장전을 마친 1열부터 다시 사격하는 전법을 사용하면서 근거리 공격에 특화된 조선 기병을 완전히 격파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원래 화승총은 한번 장전하고 발사한뒤 재장전하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단점 때문에 널리 사용하지 않았고, 조선 역시 화승총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이미 사용중이던 총통과 활 덕분에 조총을 그다지 크게 신경쓰지 않던 와중에 이런 전술로 대패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조총에 놀란 조선조정 역시 항복해온 왜군들로부터 조총을 받아들여 복제해 대량생산에 나서고, 본격적으로 조총병의 양성에 나서면서 왜군에 맞서는 정병을 육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벌어지는 전투에서 조선의 총병들은 왜군과 대등한 사격실력을 보여줬고, 그로인해 조선의 조총은 빠른 발전을 이루어내기 시작합니다. 이미 총통을 생산하여 사용한 경험이 있는 조선인만큼 생각보다 조총의 생산은 더욱 쉬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지루하게 7년간 이어진 전쟁이 마무리되고, 조총은 조선과 일본에서 각기 다른 역사를 갖게 됩니다.
이미 일본에서 유용하게 사용했던 조총은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서면서 조총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과 함께 농민반란을 막기위한 목적으로 총을 배제하고 억압하면서 일본의 화승총이 도태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적극적으로 조총을 생산하고 비중을 늘렸으며, 그로인해 총병의 비중이 훨씬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다만 이제 조선의 적으로 떠오른 북방의 여진족은 빠른 기동력과 방어력으로 조총의 피해를 줄일수 있었고, 근접전투에서 불리한 조총의 단점을 이겨내지 못하고 여진과의 잇따른 전쟁에서 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렇지만 조선은 화승총에 대한 개량과 발전을 계속해 나갔으며, 장전속도를 개량하거나 좀더 쉬운 운용에 노력하는등 화승총은 그렇게 조선군의 주력무기로 거듭나게 됩니다.
특히 청나라와 러시아가 싸웠던 전쟁에서 조선의 총병들이 참전해 혁혁한 전과를 올렸을만큼, 당시 조선의 총병들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좋은 실력을 보여줄 정도였습니다.
거기에 조선과 함께 싸웠던 명나라 역시 육로를 통해 화승총을 받아들였는데, 이것은 바다를 통해 전해진 포르투갈제 총보다 위력이 좋았기 때문에 명나라가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정식무기로 채용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역시 조선과 비슷하게 여진의 팔기군과의 전투에서 크게 패하는 일이 많았고, 결국 청나라로 이름을 바꾼 여진에게 전 국토를 점령당하면서 나라를 빼앗기게 됩니다. 이후에도 청나라의 만주팔기는 전통적인 여진의 무기를 사용했지만, 한족으로 이루어진 녹영병은 대포와 화승총으로 무장한 집단이었으며 팔기군이 무력화된 이후에는 청나라의 주력군으로 활약하게 되었습니다.
화승총은 서양에서 만들어져 운용되다가 아후 새로운 무기들에 밀려 사라졌지만, 동아시아에서는 생각보다 오래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조선에서 군의 주력으로 사용할 만큼 많이 사용되었고, 범과 표범을 비롯한 호환이 잦았던 조선에서 이들을 사냥할 목적으로 널리 보급했다고 합니다.
거기에 19세기 후반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의 주력무기가 화승총이었다고 하니, 정말 조선에서는 화승총이 오랫동안 사용된것을 알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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