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의 통치실패를 보여준 백련교도의 난

2023. 11. 1. 13:10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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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원나라가 대륙을 지배할때, 강남지방의 한족들은 불가촉 천민으로 취급받으며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살아갔습니다. 하지만 풍요로운 강남지방에서 몽골족들은 수탈하기 바빴고, 결국 백련교도들을 중심으로 한 홍건적의 반란이 일어나면서 결국 원나라가 북쪽으로 쫓겨나고 홍건적의 한 갈래였던 주원장이 황제가 되어 명나라를 건국하기에 이릅니다.

 

그렇지만 주원장은 태도를 완전히 바꾸어 백련교도들을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백련교는 명교라도고 하며 주원장이 나라이름을 명나라로 한 것 역시 사방에서 들고일어나던 명교신자들과 자신의 출신을 반영한 것이라는 일설도 있는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야 하지만 오히려 주원장이 이들을 탄압하고 나선 것입니다.

명나라 역사 내내 백련교도들은 탄압을 받았고, 결국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는 순간까지도 백련교는 험한 산지에 숨어있는 이들에게 비밀리에 전수될 정도로 정부의 견제를 받았습니다.

 

세월이 더 흐른뒤 청나라의 건륭제는 자신이 존경하던 할아버지인 강희제의 재위기간을 넘기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살아있을때 아들인 가경제에게 황제자리를 넘겨주었습니다. 하지만 말로만 물러났을뿐, 중요한 실권은 넘기지 않고 거의 모든것을 자신의 의지대로 처리하고 있었습니다.

흔히 건륭제를 청나라의 최전성기를 이끈 강건성세의 마지막 군주로 기억하지만 이미 국가의 기강은 무너지고 부정부패가 판을 치는 상황이었습니다. 건륭제 자신마저 신하들에게 비싼 선물을 강요하여 받아냈으며 그가 가장 신임하던 화신은 청나라 재정의 몇년치를 집안에 숨겨둘만큼 뇌물을 받는게 여념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러는 상황에서 온갖 부담은 최하층인 농민들에게 집중되었고, 백련교는 이들과 함께하며 부당한 착취에 항의하고 지방관의 가렴주구에 반항하는 역할을 여전히 수행중이었다고 합니다.

건륭제의 재위기간이었던 1774년 산동지방의 청수교가 일으킨 반란을 시작으로 무르익은 농민반란은 이후 계속 이어지며 청나라의 허울과도 같았던 강건성세라는 이름을 철저히 깨부수는 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1796년 건륭제가 물러나면서 아들인 가경제가 자리를 이어받은 그 해, 일어난 백련교도의 난은 청나라를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특히 이들의 반란을 쉽게 진압하지 못하면서 중앙정부가 부담해야 하는 전쟁경비가 꼬리에 꼬리를 이어 늘어났으며, 그로인해 새로운 세금을 신설해 다른 지방의 농민들을 쥐어짜야 했으니 청나라의 본격적인 쇠퇴를 알린 대표적인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1796년 호북성 양양에서 발생한 반란군의 우두머리는 왕총아라는 젊은 여성이었습니다.

그의 남편은 양양지방을 총괄하는 백련교의 대표로, 청나라 조정에 반기를 들고 반항하다가 살해된 후 그의 아내인 왕총아가 모든 무리를 규합해 청나라 정부에 반항하는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겨우 스무살의 나이에 지나지 않았던 왕총아는 교도들을 이끌고 각지를 점령했으며, 하남과 산동을 비롯하여 감숙과 사천지방까지 이들의 반란에 호응하는 움직임이 일어날 정도로 광범위한 규모를 자랑했습니다.

청조정이 자랑하는 군대인 철기군이 파견되어 싸울 준비를 하자, 모여들어 타격을 주고 바로 흩어진 후 각개격파로 팔기군을 농락하며 승리하니 청나라 조정에서도 굉장히 난감했다고 합니다.

 

결국 이들을 쉽게 진압하지 못하고 주민들을 한 곳으로 모아 반란군과 철저히 격리시킨후, 산에 몰아넣어 전멸시키는 작전을 사용했을때도 지리를 잘 알고있는 백련교도들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포위한채 굶겨 죽이는 전법을 사용하고 나서야 청나라군이 승기를 잡을수 있었습니다.

또한 각지의 향신을 비롯한 지역 유지들이 청나라 정부의 편을 들면서 토벌군에 가세하며 더욱 힘들어졌고, 결국 식량이 떨어진 백련교도들은 항복했으며 왕총아는 벼랑에 떨어져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3년만에 진압된 이 반란은 청나라 조정의 실력에 의문을 품게 만들었고, 팔기군이 유명무실해졌다는 사실만 모두에게 알리게 되는 꼴이 되어버렸습니다.

 

특히 이 반란을 진압하면서 청나라 조정은 전비로 은 1억 2천만냥을 사용해야 했고, 각지가 전쟁터가 되어 농경지가 망가지고 사회가 뒤숭숭해졌지만 농민들을 수탈하는 것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직접 반란을 진압하지 못하고 각 지방의 유력 향신들에게 도움을 받아 간신히 해결해야 했으며 이들에게 지급된 돈과 특권은 오히려 다른 지방에서의 반란을 부추기는 결과는 낳았습니다. 그로인해 다른 곳에서 일어난 백련교도들의 반란은 10년을 지속하며 청나라 조정의 근심거리로 남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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