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직전의 조선과 후금의 속사정

2023. 9. 3. 11:02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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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년 정묘호란이 발생한후 후금과 조선은 형제의 맹약을 맺었습니다.

이후 조선은 동등한 입장의 외교를 생각했지만 후금은 그럴 생각이 없었고, 향후 발생한 기근 덕분에 조선의 곡물을 가져올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후금상인과 조선상인의 대립으로 무역은 파탄을 맞았고, 더욱 기근으로 힘들어진 후금은 오히려 명나라를 공격하여 하북지역의 막대한 물자와 인력을 사로잡아 국력을 키우게 됩니다.

 

후금이 당시 몽골을 공격하여 영토를 크게 확장했는데, 그러는 과정에서 명나라의 난공불락의 요새인 산해관을 크게 우회해 장성의 취약한 부분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명나라 정벌은 후금의 국력을 크게 키울수 있게 도와주었고, 그나마 막대한 경제력으로 후금을 막아내던 명나라의 입장에서는 넓은 국경지대를 전부 방어할수 없어 갈수록 북경인근의 식량과 은을 약탈당하게 되었고 50만이 넘는 포로를 데리고 귀환한 후금군에 의해 만주일대의 토지가 개간되며 후금의 국력이 더욱 강화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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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1629년 조선의 가도에 자리를 잡고 강력한 수군으로 후금을 견제했지만,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서 뇌물을 받아먹고 백성에게 큰 피해를 끼친 모문룡이 당시 명나라의 최고 사령관이었던 원숭환에게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원숭환이 그를 소환하자 자신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수많은 군사를 이끌고 원숭환에게 갔지만, 결국 원숭환은 그를 처형하고 부하들에게는 죄를 묻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일처리에 불만을 품은 모문룡의 부하인 공유덕과 상가희는 수많은 전선과 많은 수군들, 그리고 후금의 누르하치를 죽게 만들었던 홍이포까지 가져와 명나라의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이런 공유덕과 상가희를 토벌하기 위한 명나라 정부군이 조선 가까이 오면서 식량지원을 요청하고, 오히려 후금에서는 조선에 공유덕과 상가희를 위한 식량지원을 요청하는 딜레마와 같은 상황에서 조선은 명나라에 식량지원을 하며 후금의 심기를 건드렸던 것입니다.

 

결국 몽골족이 가지고 있던 원나라시기의 옥새까지 손에 넣은 홍타이지는 1636년 2월 천명을 받았다며 칭제건원을 하게되고, 나중에 조선침공의 선봉장이 되는 용골대가 사신으로 들어와 군신관계를 수립할 것을 강요하게 됩니다.

당시 홍타이지가 보낸 국서는 조선조정에 제대로 접수조차 되지 않았으며, 인조는 이들을 접견조차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거기에 사신들 주변으로 무장한 조선군인들이 돌아다녔고 백성들조차 이들에게 돌을 던질 정도로 푸대접을 받으며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습니다.

 

1636년 4월 홍타이지는 결국 나라이름을 후금에서 청으로 바꾸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 자리를 축하하기 위한 조선의 사신들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이들은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례를 올리는 것도 거부하였고, 상을 뒤집어 엎어버리는등 난동을 피웠다고 합니다. 청나라 신하들은 이들을 당장 죽이자고 하였지만, 홍타이지의 배려로 조선으로 보내는 국서를 가지고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이 국서에서는 그동안 조선이 후금에 협조적으로 나오지 않은 점을 책망하면서 왕자를 볼모로 보낼것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그나마 조선과 전쟁하고 싶지 않았던 홍타이지의 마지막 배려였던 것으로 보였지만, 사신들이 국서를 찢어버리고 내용만 베껴서 조선으로 돌아오는 일까지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이정도면 충분히 인내심을 가지고 참았던 홍타이지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고 보일수밖에 없습니다. 당시 조선은 허약했기 때문에 청군이 바로 공격해 들어오면 굴복시킬수 있었을텐데, 조선의 모든 사정을 봐주면서 인내했던 홍타이지가 새삼 다르게 보일 정도입니다.

 

 

이쯤되면 조선으로서도 전쟁을 각오하고 국방에 신경써야 했지만, 당시 정권을 잡은 서인들은 입으로만 전쟁을 떠들고 명나라의 지원을 받아 후금을 물리칠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최명길을 비롯한 현실을 직시한 신하들이 대책을 세우자고 해도 제대로 된 정책도 세우지 않고 그저 시간만 보낼 뿐이었습니다.

그나마 사르후 전투에서 그동안 양성한 정예병을 잃어버렸고, 이괄의 난까지 다시 양성한 군대는 반란으로 모두 흩어졌으니 바로 정예병을 길러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이괄의 난을 진압한 정충신과 장만 등을 중용하지 않고 한직으로만 돌렸던 것입니다.

당시 집권하던 서인들이 군대를 철저히 자신들의 조직으로 만들었고, 그로인해 서북지역의 방어선은 전혀 보강되지 않은채 결국 1636년 겨울 청나라 군대가 얼어붙은 강을 건너 공격해 들어왔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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