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고구려 초기의 왕자들

2023. 8. 29. 12:11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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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2대 태왕으로 즉위한 유리태왕은 동부여와의 관계에 신경을 써야 했습니다.

당시까지는 동부여보다 국력이 약한 고구려였기 때문에 동부여왕 대소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줄수밖에 없었고, 그로인해 기원전 6년 유리태왕은 자신의 큰아들인 도절을 부여에 인질로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10대 초반의 어린 나이였던 도절은 부여에 가기를 겁냈고, 그로인해 대소가 쳐들어와 고구려와 싸웠지만 마침 내린 큰 눈으로 인해 손해만 보고 물러났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있습니다.

그 이후에도 동부여의 요구는 계속되었고, 유리태왕은 부여와 화친하기 위해 강경론을 주장하는 신하들을 제거한후 다시 도절을 인질로 보내려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10대 후반으로 성장한 도절이 태자가 되어 부여와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면서 여전히 인질로 가기를 거부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갑자기 별다른 원인도 없이 도절은 죽음을 맞게 됩니다.

아마도 부여와의 화친을 원한 유리태왕에 의해 자살 혹은 타살이 아닌가 추정되며, 그렇게 고구려의 태자 자리는 그의 동생이었던 해명에게 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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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태자가 된 해명은 고구려의 목표였던 다물을 실행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합니다.

당시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하며 이런 다물보다는 안정을 꾀한 유리태왕과는 달리 이전수도인 졸본 일대에 남아 있으면서 백성을 위로하고 국토를 넓히기위한 노력을 기울였다고 하는데, 이로인해 유리태왕의 눈 밖에 난것으로 보입니다.

서기 8년에 이웃의 황룡국에서 고구려에 강한 활을 보내 자신들의 힘을 과시했는데, 황룡국의 사신 앞에서 해명이 이 활을 꺾어버리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것은 황룡국이 고구려를 앞잡아보지 못하게 힘을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었는데 마침 아들을 죽일 구실을 찾기위한 유리태왕의 명령으로 해명은 자결하게 됩니다.

 

당시에도 주변사람들이 잠깐 고개를 숙이고 태왕에게 빌것을 청했지만, 이미 돌아선 태왕의 마음을 돌릴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던 해명은 땅에 창을 꽂아놓고 말을 달려 그 위에 떨어져 자결했다는 내용이 삼국사기에 전해집니다.

 

그리고 앞서 일어난 사건들 못지 않게 비극적인 사건이 훗날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 역사의 비극으로 기록되어 있는 낙랑공주와 호동의 안타까운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시간이 좀더 지나 3대 대무신태왕이 즉위하면서 고구려는 국력을 크게 키웠는데, 당시 고구려의 남쪽에 있던 낙랑국을 차지하기 위해 대무신태왕의 아들인 호동이 이쪽으로 내려와 염탐하던 중이었습니다.

대무신태왕 15년인 서기 32년에 호동이 옥저를 유람하고 있었는데, 낙랑왕이었던 최리가 그를 발견하고 고구려 태왕의 아들임을 알아챈후 그를 데려와 자신의 딸과 혼인시켰다고 합니다.

 

최리 입장에서는 고구려와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으로 호동에게 딸을 주었지만, 호동은 그녀를 이용해 낙랑을 점령할 계획을 세웁니다.

낙랑국에서는 적의 침입을 알려주는 북과 나팔이 있었는데 그것을 부수고 낙랑을 고구려가 점령하면 그때와서 정식으로 그녀와 결혼하겠다는 계획이었습니다. 결국 사랑에 눈이 먼 낙랑의 공주는 북과 나팔을 부수어버렸고, 그렇게 습격한 고구려군에게 낙랑국은 점령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호동이 그녀를 찾았을때는 이미 최리의 손에 의해 살해된 후였고, 그로인해 죄책감을 가지게 된 호동은 낙랑공주의 무덤 앞에서 한동안 대성통곡하며 울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낙랑국을 점령하는 큰 공을 세운 호동이었지만 그의 공적을 질투하고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만드려한 계모의 모함을 받게 됩니다. 이미 삶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방황하던 호동은 아버지에게 변명조차 하지 않은채 칼을 놓고 엎드려 자결하며 낙랑공주의 뒤를 따라갔다고 합니다.

 

고구려 초기 왕자들의 모습을 보면 정상적으로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배경과 일어났던 사건으로 인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이 태왕이 되어 고구려를 통치했다면 우리가 알고있는 고구려의 역사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역사에 가정이 없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생을 마감한 고구려의 왕자들이 하나같이 출중한 능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더욱 안타까운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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