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에 발생한 조선인 포로와 송환문제

2023. 8. 25. 11:25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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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조선인들은 두가지의 선택을 해야했습니다.

도망간 조선 조정을 따라 피난하면서 조선인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우리집과 고향을 점령한 왜군에게 항복하고 살 것인가의 선택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결국 많은 조선인들이 왜군에 항복하거나 포로로 끌려갔고, 특히 이후 발생한 정유재란부터는 조선인을 죽이고 남은 사람들은 포로로 끌고가는 현상이 발생하면서 더욱  일본으로 많은 조선인들이 끌려가게 됩니다.

 

대부분 일본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줄어든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한 조선인들을 조직적으로 납치한 일본이지만, 막상 포로들은 기구한 삶을 살아갔다고 합니다.

조선인 포로들은 양민들만 납치된 것이 아니라, 양반을 비롯한 군인들과 학자들까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강항같은 학자들은 일본에 성리학을 전수하는 등 일본 문화 발전에도 큰 기여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포로들은 비참한 대우를 받을수밖에 없었으며 일부는 당시 유행하던 흑인노예들보다도 헐값에 팔려나갔고, 멀리는 유럽까지 끌려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고 하니 당시 조선인 포로들은 흑인들보다도 못한 대우와 취급을 받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더욱 문제는 이런 조선인 포로의 정확한 숫자도 밝혀진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전쟁이 끝난후 1607년 사명대사가 일본에 와서 조선인 포로들의 송환을 요구하면서 에도막부와 담판을 벌여 수천명의 포로들을 데리고 귀국했습니다. 2년후인 1609년에도 조선의 사절들이 와서 천명 남짓한 조선인 포로들을 데리고 귀국했다고 하는 기록이 있으니 정말 얼마나 많은 숫자의 포로들이 당시 일본에 있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당시 조선과 일본의 기록을 살펴보면 거의 8천여명의 포로를 조선으로 데리고 왔다는 기록이 있으니 적어도 10만명 정도는 일본에 납치되어 끌려갔고, 무기를 얻기위한 수단으로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팔려나갔다는 것을 감안하면 얼마나 많은 숫자의 조선인들이 끌려갔는지 가늠이 안될 정도입니다.

 

그런데 전쟁이 마무리된후에는 크게 줄어든 인구를 보충하기 위해서라도 일본에 끌려간 포로들을 데려오는 일에 적극적이었어야 할 조선정부는 포로송환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포로들이 자발적으로 왜군에 따라간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고 하며, 절개와 지조를 지키지 못했다면서 비난하는 일도 있었다고하니 당시 조선정부의 인식이 어땠는지 알수 있습니다.

특히 조선포로들이 돌아왔을때 고향과 신원을 특정할수 없는 인원들은 전부 노비로 삼았다고 하며, 포로들을 그저 동래에 방치해놓고 돌보지도 않아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도 못했다고 하니 기가막힐 노릇입니다.

 

이런 일들은 일본에도 전해져서 조선인 포로 사이에서도 금방 퍼지게 됩니다.

어차피 조선으로 돌아가도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조선 조정의 의심을 사서 감시당하는 삶을 살바에는 그냥 일본에 눌러앉는게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아예 일본에 정착하는 사람이 늘어났다고 합니다.

그나마 글을 아는 선비들은 농시를 짓다가도 이를 알아본 일본인들에게 글을 가르치면서 살았고, 도자기를 만들줄 아는 도공들은 일본에서 도자기를 만들면서 살았다고 하지만 절대 다수의 양민출신 포로들은 그저 비참하게 노등력을 제공하면서 살아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일이 발생해도 조선정부는 전혀 교훈을 얻지 못했고, 이후 일어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통해 또다시 청나라로 50만여명이 끌려가는 일이 발생했지만 이들은 송환시키기는 커녕 절개와 지조를 지키지 못했다며 비난하기 바빴습니다.

오죽하면 지금 욕설로 쓰이는 화냥녀라는 단어가 이때 돌아온 여성들을 욕하면서 생겨났다는 환향녀에서 비롯된 말이라는 주장도 있을 정도니, 조선 조정의 대처는 임진왜란때와 비교해서 전혀 나아진 것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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