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8. 23. 11:39ㆍ역사
조선 현종시기 발생한 경신대기근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욱 비참하고 참혹한 사건이었지만, 역사책에서는 그저 한줄 기록으로 대신하는 경우가 많고 우리 인식도 그저 2년여간 고생한 기억으로만 단편적으로 알고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경신대기근은 1670년 경술년과 1671년 신해년까지 이어진 기근이었고, 단순한 흉년으로 끝난것이 아니라 가뭄과 홍수가 이어지고 결국 전염병마저 크게 돌아 조선후기의 역량을 크게 깎아먹은 큰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1670년부터 시작합니다.
경술년 1월에 햇무리와 달무리가 관측되었고, 이것이 계속 이어지면서 불길한 조짐이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던중 1월 초에는 전라도 영암과 영광에 지진이 일어난 것을 시작으로 2월에는 경기도, 5월에는 황해도에 지진이 일어나더니 8월에는 가장 풍요로웠던 삼남지방에 지진이 연속으로 일어나 대기근의 시작을 알렸다고 합니다.
2월부터는 본격적인 가뭄이 시작되었고, 비는 오지않고 눈과 우박이 내리는 일이 반복되더니 결국 모내기철까지 비가 오지 않아 하천과 우물까지 말라버렸다고 합니다. 이렇게 농사를 시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데 메뚜기떼가 창궐해 그나마 남은 곡식을 먹어치우자 정말 모든이들의 의욕이 꺾였다고 전해집니다.
6월부터는 비가 오기시작했지만, 장마와 태풍이 겹치면서 완전히 농사를 접어야 할 정도로 타격이 심했습니다.
7월에 비가 잦아들었지만 다시 눈과 서리, 우박이 내리면서 남부지방을 강타한 태풍으로 인해 제주도는 해일이 발생해 짠물이 육지로 밀려들어왔고 그로인해 제주의 인구가 절반이상 줄어들었다고 전해집니다.
특히 이때는 소를 농사에 이용하면서 유용하게 써먹었는데, 소들에게도 전염병이 돌면서 전국에서 소가 떼죽음 당하는 수준까지 이르렀습니다. 여기에 굶주린 사람들 사이에 전염병이 도는와중에 혹독하고 추운 겨울이 닥치면서, 조선의 기근대응 능력을 완전히 바닥으로 내팽개치게 되었습니다.
1671년 신해년이 되자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악화되었습니다.
원래 봄에는 보리가 나오기 전까지 굶주림이 생기기 마련인데, 이미 전년도에 발생한 대흉작으로 인해 버틸수 있는 힘이 없어진 사람들에게 굶주림과 전염병이 발생했던 것입니다. 거기에 조선팔도가 전부 기근이 들었기 때문에 이런 비극이 조선 전체를 뒤덮어 버린 것입니다.
1월에 굶주린 사람들을 위한 진휼소를 설치했는데, 이로인해 굶주린 이들이 전부 서울로 올라와 조금이라도 죽과 약을 먹기위해 몰려들었습니다. 이로인해 한성 내에 더욱 전염병이 창궐하게 되었고 한성부의 거주민과 양반들은 물론이고 도성과 궁을 수비하는 군인들과 궁 내의 궁녀들까지 병에 걸리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현종의 누이인 숙경공주까지 병에 걸려 사망하자, 현종도 궁을 비우고 도망가야 할 정도로 참혹한 현실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양반과 왕족들까지 전염병에 걸리게 되고 사망자가 속출하자 많은 신하들이 사직서를 내고 한성을 탈출하는 일까지 벌어졌다고 합니다.
수도 한복판에서 사람들이 계속 죽어나갔지만 시신을 치울만한 기운도 없고, 담당할 관리들도 죽어버렸기 때문에 절에 배치된 승려들을 동원하여 시신을 치우게 했을 정도로 조선의 행정력에도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결국 이런 상황이 되자 전국적으로 식인행위가 보고될 정도였습니다.
원래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엄격한 유교적 질서를 강조하던 조선왕조였지만, 이런 상황이 되자 조정에서도 처벌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곳곳에서 부모가 자식을 버리고, 장성한 자식은 늙은 부모를 버렸으며 충청도에서는 한 여인이 굶어죽은 자식을 삶아먹었다는 기록이 보일만큼 현실은 참혹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조선 조정에서는 이 여인을 처벌하지 못하고 내버려둘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나마 국가가 가지고 있던 곡식으로 굶주린 이들을 구휼해왔는데, 이것마저 동나게 되자 청나라로부터 쌀을 수입하자는 논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청나라가 쌀을 보내줄지도 의문이고,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 쌀을 들여오지 못했습니다.
이런 참혹했던 2년간의 대기근으로 조선의 인구는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1671년 12월의 보고에 의하면 사망자가 100만명을 넘어간다는 내용이 있으므로, 당시 조선인구의 5퍼센트 남짓한 사람들이 굶어죽거나 병으로 죽은 것입니다. 여기에는 왕족이나 고위급 양반들까지 포함되어 있어 당시 죽음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정말 참혹했음을 알수 있습니다.
임진왜란에는 7년간 전쟁이 이어지며 제대로 된 농사를 할수 없어 많은 백성들이 굶주렸는데, 이 2년 남짓한 경신대기근에는 그때보다 더욱 혹독한 기근과 전염병이 이어지며 차라리 임진왜란때가 나았다는 목소리까지 나올 정도였다고 하니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되지않는 사건이었던듯 합니다.
결국 이 경신대기근은 조선에 대동법이 더욱 확산되어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방향으로 가는 계기가 되었고, 당시 혹독하고 긴 겨울을 견디기 위해 이전부터 사용했던 온돌의 사용이 확산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거기에 대기근으로 인해 양반들의 경제력이 약화되고 사회가 해체되면서 상평통보를 비롯한 화폐의 사용이 가속화되는 와중에 노비제도도 해체수순으로 들어섰으니, 여러모로 조선에 큰 영향을 준 경신대기근이었던 것입니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고구려 초기의 왕자들 (0) | 2023.08.29 |
---|---|
임진왜란에 발생한 조선인 포로와 송환문제 (0) | 2023.08.25 |
서진왕조를 파멸로 몰고간 팔왕의 난 (0) | 2023.08.17 |
아직도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한 일본 (0) | 2023.08.15 |
당나라의 영웅 태종도 실패한 고구려원정 (0) | 2023.08.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