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진왕조를 파멸로 몰고간 팔왕의 난

2023. 8. 17. 11:13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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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씨가 위나라를 찬탈할수 있었던 배경에는 위나라의 정치구조가 한몫 담당했습니다.

위나라를 건국한 조비는 강력한 황권으로 황족들을 찍어눌렀고, 그로인해 강력한 황족들이 생겨날수 없었으며 이후 사마씨가 국가를 전횡하면서 찬탈까지 이어져도 별다른 저항을 할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 서진왕조를 세운 사마염은 사마씨 황족들에게 지방의 땅을 나누어주고 군대를 양성할수 있게하여 황실의 울타리로 삼았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전략이 먹혀들어가면서 안정된 국가를 운영할수 있었지만, 정작 문제가 터지기 시작한것은 그렇게 오랜시간이 흐르지 않은 시점부터입니다.

 

특히 사마염의 아들 사마충은 역사에 이름을 남길만한 백치인데, 그냥 머리가 나쁜 정도가 아니라 정상적인 사리분별과 판달을 하지 못하는 정도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한동안은 사마염도 태자를 바꿀 생각을 했지만 주변 신하들의 반대로 결국 사마염이 죽고 사마충이 그 뒤를 잇게 됩니다.

새로 황제가 된 혜제는 정상적인 정치를 할수 없었기 때문에 황후인 가남풍이 집권해 정치를 하게 됩니다. 우선 사마염의 부탁을 받은 대신 양준을 제거하기 위해 초왕 사마위를 불러 양준과 그의 일족을 전부 죽이고 가남풍이 정권을 잡았습니다.

 

이후에는 여남왕 사마량을 불러 혜제를 보필하게 했는데,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행동하는 일이 많자 결국 사마위에게 밀서를 보내 사마량을 죽이게 했고 결국 사마위에게 모든 혐의를 뒤집어씌워 처형해버렸습니다.

거기에 이미 세워져있던 태자를 폐하고 새로운 태자를 세우는 과정에서 가남풍은 태자를 약찧는 절구로 때려죽였다고 합니다. 이후에는 자신이 데려온 아이를 태자로 세웠는데, 이런 상황을 넘기지 못한 사마씨 종친들이 들고 일어나게 됩니다.

 

결국 조왕 사마륜이 군사를 이끌고 낙양에 진입해 가남풍을 낙양 외곽인 금용성에 유폐한후 금가루가 들어간 술을 먹여 살해했다고 합니다. 그런후에는 혜제를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자신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제왕 사마경은 성도왕 사마영과 하간왕 사마옹을 부추겨 군사를 일으켜 사마륜을 죽이고 혜제를 다시 복위시켰습니다. 이렇게 집권한 사마경은 원래 유능한 인물로, 사람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 사람이었지만 권력을 잡자마자 주색에 빠져 국가는 돌보지 않고 놀기만 했다니 정말 권력이란 무서운 것인가봅니다.

 

이런 꼴을 지켜보던 장사왕 사마예가 반란을 일으켜 결국 사마경을 죽였고, 사마예가 모든 전권을 장악하자 앞서 사마륜을 죽이는데 앞장섰던 하간왕 사마옹이 군사를 동원해 낙양 인근에서 전투를 벌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낙양에 있던 동해왕 사마월이 사마예를 공격해 불태워 죽였는데, 이로인해 사마예는 피를 보지 않은 유일한 사마씨로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결국 성도왕 사마영이 집권하여 모든 권력을 잡자, 이것에 반발한 동해왕 사마월이 다시 반란을 일으켜 사마영과 사마옹을 모두 죽이고 집권했으며 혜제마저 죽고 새로운 황제인 회제를 즉위시키며 장장 16년에 걸친 팔왕의 난이 마무리되었습니다.

 

대략적으로 서술한 팔왕의 난이지만, 결코 등장하는 인물의 숫자가 적지 않고 사건 또한 복잡합니다.

거기에 국가를 보위해야 할 사마씨 황족들이 오히려 자신들의 사병을 이끌고 전쟁을 벌이는 한편, 국경 밖에 있는 이민족들까지 끌어들여 내전에 동원할 정도였으니 당시 서진의 국가기강이 말이 아니었던 것이 이해가 됩니다.

이런 치열한 내전끝에 국가지도층은 전부 죽고, 군사는 모두 소모되었으며 전투로 인해 낙양과 장안일대는 전부 황폐화되었다고 하니 서진왕조가 이후 이민족의 침입을 받고 멸망한 것은 당연한 결과로 보입니다. 

 

그나마 팔왕의 난 덕분에 서진왕조가 약해졌고, 그로인해 고구려 미천태왕은 낙랑군을 밀어내고 영토를 넓힐수 있었으며 이후 고구려는 요동을 확보하고 백제는 진평군을 설치해 잃어버린 조선의 영토를 일부 되찾는 성과를 올렸으니 우리에게는 그나마 긍정적인 효과가 있던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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