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8. 9. 16:39ㆍ역사
형과 동생을 죽이고 아버지까지 밀어내고 황제가 된 이세민은 곳곳에서 승리를 거둡니다.
특히 이어진 정벌활동에서 그동안 굴복시키지 못했던 돌궐을 세력아래로 두었고, 서역지방의 실크로드 지역까지 되찾으면서 당나라의 국력을 과시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당나라의 태종 역시 고구려를 눈엣가시처럼 여겼고, 주변이 정리되자 고구려를 칠 준비를 합니다.
특히 친당정책으로 무리한 저자세로 일관하던 영류태왕이 연개소문의 쿠데타로 죽자, 결국 당태종은 645년 고구려를 전면적으로 침공해들어온 것입니다.
그래도 위징이 살아있을때는 고구려원정의 부당함을 지적하며 말렸지만, 위징이 결국 죽은 후에는 바로 정벌군이 편성되어 고구려를 공격하게 되었습니다.
태종은 기라성같은 자신이 자랑하는 이세적, 울지경덕, 이도종, 장검 등의 명장들과 직접 친정에 나섰는데, 이때의 당나라군의 숫자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황제가 직접 나서는 친정이고, 수나라의 복수를 천명하며 나선 전쟁에 고관대작들이 다수 참여한 전투이기 때문에 결코 적은 숫자의 규모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앞서 수나라가 113만 대군을 동원했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당나라에서는 못해도 50여만의 정예부대를 동원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거기에 안시성을 공략하기 위해 50여만의 인원을 동원하여 흙산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것을 보면, 결코 적은숫자의 군사를 동원했다고 볼수 없을 정도로 많은 당나라의 국력을 쏟았다는 것도 추측할수 있습니다.

645년 4월, 갑작스럽게 고구려의 방어선을 돌파한 당군은 고구려의 현도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좀더 위쪽에서 고구려의 신성을 공격하던 이도종은 여의치않자 남쪽의 개모성을 열흘동안 공격하여 함락시켰고, 개모성을 방어하기 위한 고구려군도 격파하여 기세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5월에는 수나라가 그렇게 공격해도 함락시키지 못했던 요동성을 포위했고, 이세적을 총사령관으로 한 당군이 요동성을 거세게 공격했습니다. 그동안은 잘 버티던 요동성이지만 당나라의 공성무기인 포차를 동원한 공격에 타격을 입었고, 바람이 세차게 부는 바람에 불까지 번져 요동성 안이 불에 타버렸고 그로인해 고구려군 만명은 싸우기도 전에 불에 타서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렇게 굳게 버티던 요동성은 당나라군에게 함락되었고, 만명의 고구려군이 사로잡히고 4만명의 남녀가 포로로 잡혔으며 50여만석의 양곡이 당나라의 손으로 넘어갔습니다.
아마 고구려는 예전처럼 요동성이 잘 버티는 가운데 반격을 준비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당나라의 태종을 비롯한 지휘관들의 역량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요동에서 가장 큰 성인 요동성까지 함락되는등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거기에 남쪽의 중요한 기지인 비사성까지 함락되어 버렸기 때문에, 요동지역은 당나라의 손으로 넘어가는듯 보였습니다.
결국 남아있는 중요한 성인 안시성이 당나라에 의해 포위되었을때, 결국 고구려는 15만의 대군을 편성하여 안시성을 구원하기 위해 보냈습니다.
이 군대는 북부욕살 고연수와 남부욕살 고혜진이 통솔했다고 하지만, 싸우기 전에 대로 고정의가 당군과의 직접적인 교전을 피하고 보급선을 끊자는 의견을 내놓았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이 15만 대군의 총사령관은 고정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당나라가 기록한 소위 주필산 전투에서는 고연수와 고혜진이 이끄는 군대가 당군과 잘 싸웠으나 결국 당나라에 패배하였고, 만명에서 2만명의 전사자를 냈으며 남은 37000여명은 항복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결국 15만 중에서 5만여명이 전사 혹은 항복했어도 남은 10만명의 고구려군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니, 결국 고연수와 고혜진이 이끄는 일부의 고구려군만 패하였고 주력군은 남아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구당서에서는 15만 고구려군이 전부 항복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신당서에서는 말갈병 3천을 죽이고 3만의 고구려군은 돌려보냈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적어도 이 부분에서는 구당서와 신당서의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봐야겠습니다.
그런데 주필산전투가 6월인데, 정작 안시성을 포위하고 공격하기 시작한 것은 50여일이 지난 8월입니다.
분명 주필산전투가 당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면, 바로 그 기세를 몰아 안시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을텐데 그렇게 하지 않은것을 보면 구당서나 자치통감이 기록하고 있는대로 당군이 크게 이긴 싸움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거기에 더욱 미심쩍은 부분은 당나라의 장군들이 안시성을 공격하지 말고, 평양쪽으로 바로 공격할 것을 주장한 것입니다.
수나라도 요동성이 함락되지 않자 이렇게 직접 평양쪽으로 내려갔다가 패한 경험이 있긴 하지만 안시성이 잘 버티는 와중에 주필산전투에서도 큰 손해를 보자 이런 도박수를 권한것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하지만 결국 안시성을 계속해서 공격하기로 결정되었고, 계속해서 공격했지만 안시성은 함락되지 않았습니다.
특히 안시성에서는 자주 야습을 감행해서 당군을 괴롭혔고, 이것을 당태종이 예측하고 물리쳤다고 기록되어 있긴 하지만 이런 고구려군의 기습으로 당군이 힘들고 지친것은 사실로 보입니다.
이렇게 안시성이 잘 버티자 성을 함락시키기위해 50만의 인원을 동원하여 성벽근처에 흙산을 쌓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흙산이 완성되어도 성은 잘 버티었고, 오히려 산을 고구려군에게 빼앗기고 패했다고 하니 당군의 사기가 떨어지는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안시성이 잘 버틴 이유도 있겠지만, 주필산 전투 이후 당군의 모습이 뭔가 변한듯 보이기도 합니다.
요동성을 공성무기로 함락시키고 양곡을 빼앗을때까지만 해도 승승장구하던 당나라군이, 갑자기 주필산에서 고구려 구원군과 싸우고난 후에는 거의 50일동안 다른곳을 공격하지도 못하고 전사자를 위로하고 진지를 옮기는 등 이전과는 다른 의미없는 행동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것은 주필산전투에서 당군이 승리한것이 아니라 무승부, 혹은 판정패 했을 가능성도 있는것입니다. 특히 나중에 태종은 전쟁후에 신성, 건안, 주필의 전투를 되돌아보며 이때 전사자가 많이 나왔고 피해가 극심했다는 기록도 있는것을 보면 확실히 주필산전투에서 당군이 큰 피해를 입었다는 것은 의심할수 없는 사실로 보입니다.
결국 당군은 패배를 인정하고 철군했는데, 안전한 길 대신 늪지대인 요택을 통해 귀환할 정도로 정신없이 도망쳤다고 합니다. 거기에 중국 곳곳에 야사로 남아있는 내용을 보면 연개소문이 후퇴하는 당태종을 추격하여 죽기직전까지 몰아붙였다고 하는 이야기가 남아있을 정도로 정말 큰 패배였습니다.
특히 중국역사 중에서도 가장 능력있는 황제였다는 이세민이 능력있는 신하들을 전부 데리고 직접 친정한 전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참패를 당했으며, 요동성을 비롯한 고구려의 성을 10여개 함락시키기는 했어도 결국 고구려의 방어선을 뚫지 못했다는 점과 주요 지휘관들도 죽거나 다친 인사들이 많다는 것을 보면 정말 이세민에게 유일한 실패가 된 고구려 원정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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