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7. 30. 11:56ㆍ역사
고려 태조 왕건은 치열하게 후백제와 싸웠고, 결국 승기를 잡은 상태에서 후백제의 내분이 일어나 창업주인 견훤이 고려로 망명하는 사태를 맞았습니다.
세계 역사상 전무후무하게도 자신이 세운 국가를 자신의 손으로 멸망시킨 견훤이 직접 출동한 백제와의 마지막 전투인 일리천 전투에서는 좀더 흥미로운 내용이 보입니다.
이 후삼국시대의 마지막 전투였던 일리천전투에서는 고려건국에 가장 큰 공을 세운 명장 유금필이 북방의 제번경기를 이끌고 싸움에 참전했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흑수, 달고, 철륵 등의 정예기병 9천5백을 통솔하여 전투에 투입했다고 하니 지금 우리의 상식으로는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일제의 관변학자였던 쓰다 소키치를 비롯한 인물들이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면서 고려는 한반도도 전부 차지하지 못한 초라한 국가로 격하시켰는데, 고려 초기부터 북방의 민족들을 통일전쟁에 동원하고 이들을 고려장수인 유금필이 통솔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입니다.
이중에서 흑수는 발해와 대립하다가 해동성국으로 불리는 명군이었던 선황제때 합병된 흑수말갈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들은 흑룡강 일대에 널리 분포해 살았음이 확인된바 있으니 고려의 위엄이 여기까지 미쳤던 것으로 보입니다.
달고와 철륵 또한 흑룡강 일대에서 흔적이 발견되는 세력이기 때문에, 절대 고려는 반도도 전부 차지하지 못한 힘없는 국가가 아니었으며 건국 초기부터 북방민족들을 제어하면서 강국으로 시작했음을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후 고려사에는 좀더 흥미로운 내용이 보입니다.
고려사 세가 현종 17년조에는 거란에서 야율골타를 보내 동북여진을 공격할 것이니 길을 빌려달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한창 국력이 최고조로 올라온 고려는 이것을 허락하지 않고 길도 내어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있는 역사적 사실로는 거란의 요나라가 북방의 거의 모든 땅을 차지했고, 여진마저 거란이 통제했다고 알고 있는데 앞서 살펴본 고려사의 내용은 선뜻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있는 내용에 대한 의심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고려가 동북여진으로 가는 길을 영토로 직접 차지하고 있었고 동여진을 비롯한 민족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강성했던 거란마저 고려영토를 돌아가지 못할 정도로 고려의 판도가 굉장히 컸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후 여진을 통합한 완안부가 거란의 70만 대군을 격파하고 승승장구하자 이런 고려의 질서는 위협을 받게 됩니다.
윤관이 여진을 토벌하고 공험진까지 고려가 직접 통치하는 영토로 편입했을때는 여진이 신하를 자처하며 결국 개척한 영토를 돌려주게 되지만, 지금의 하얼빈 일대를 중심으로 일어난 완안부는 아골타의 영도아래 거란을 쳐부수며 강국으로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1117년 아골타가 고려에 사신을 보내 이전에는 부모의 나라로 섬겼던 고려에 이제는 형제의 맹약을 맺을것을 요구하는 사신이 도착하자 고려조정에서는 반대의 목소리가 높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고려조정에서는 2년간 답장조차 없다가 1119년에 답장을 보냈는데, 이곳에 문제의 그 문장이 들어있던 것입니다.
예종이 보낸 답장에는 너의 근원은 내 땅에서 시작되었다 라는 문구가 있었기 때문에, 여진의 아골타가 이 문장을 문제삼아 국서를 받지 않고 돌려보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은 고려가 과거 여진을 제후국으로 삼아 통제했다는 사실과, 여진이 일어난 곳이 고려의 영토임을 밝히면서 여진에 크나큰 망신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고려가 제후국을 거느린 엄연한 황제국가였던 사실과, 여진이 과거 고려에 사대하던 사실을 밝히면서 고려가 절대 굽히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고려의 황제국가 체제는 이후 원나라의 간섭을 받으면서 제후국 수준으로 격하되어 버립니다.
고려 원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충렬왕은 원의 다루가치가 황제의 칭호와 제도를 쓰는것을 비난하자 결국 제후국 수준으로 격을 낮추었으며, 그나마 고려가 올린 묘호를 사용한 원종과는 달리 원나라가 내려준 충렬왕이라는 시호를 사용해야 했습니다.
만약 고려가 이때까지도 황제가 아닌 왕을 칭했다면 원나라에서 비난할 이유도 없고, 명분도 없습니다. 결국 이것은 고려가 황제를 칭하며 그에 맞는 제도와 명칭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원나라의 다루가치가 이것을 문제삼은 것입니다.
이후 우리역사에서는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못하다가,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니 황제의 이름을 되찾는데 700여년이 걸렸다고 볼수 있겠습니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상반된 평가가 공존하는 당태종 이세민 (0) | 2023.08.09 |
---|---|
사문난적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윤휴 (0) | 2023.08.03 |
명나라 말기의 명장이었지만 제거당하고만 원숭환 (0) | 2023.07.23 |
고려사 지리지에 기록된 동계로 살펴보는 고려 북방 강역 (0) | 2023.07.14 |
수나라 양제가 알려주는 고구려 영토의 진실 (1) | 2023.07.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