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나라 양제가 알려주는 고구려 영토의 진실

2023. 7. 9. 21:27역사

반응형

고구려를 공격했다가 전군이 몰살되는 대패를 당한 이후, 이것을 날씨 탓으로 돌리며 정신승리한 수나라였지만, 역시 수나라 문제는 명군이었습니다. 다시 고구려를 공격하기보다는 민심을 다잡는데 힘썼고 그렇게 전쟁에 패배한 수나라는 빠르게 안정되면서 고구려와 대치하게 됩니다.

하지만 604년 그의 둘째아들 양광은 태자이며 친형이었던 양용을 모략으로 떨어뜨린후 아버지 문제를 죽이고 황제가 됩니다. 이후 그토록 증오하던 그의 형 양용을 목졸라 죽였다고 하며, 아버지의 후궁마저 차지하는 패륜을 선보이는 폭군의 기질을 보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워낙 수 문제의 뛰어났던 정치 덕분에 양제의 대운하 사업과 북방의 장성을 수리하는 일에 큰 차질이 없었습니다.

수나라 문제의 집권기에는 창고에 곡식이 가득차서 저장할 공간이 없었을 정도라고 전해지는데, 이것을 전부 그의 아들인 양제가 자신의 야욕을 채우는데 사용한 것입니다.

이 재산을 바탕으로 막대한 토목공사와 대규모 원정을 진행했는데, 서쪽의 토욕혼과 북방의 돌궐을 공격하여 복속시켰으며 남쪽의 베트남까지 차지해 기세를 크게 올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양제는 이제 고구려와 싸울 생각을 굳혔다고 합니다.

 

마침 이 시기에 신하인 배구가 양제에게 간언한 내용이 전해집니다.

고구려는 본래 기자(箕子)가 책봉을 받은 땅으로, 한(漢)·진(晉) 때 모두 군현으로 삼았습니다. 지금 신하가 되어 섬기지 않고 따로 외국의 땅이 되었으므로 선황께서 정벌하고자 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다만 양량(楊諒)이 못나고 어리석어 군대를 출동시켰으나 공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폐하의 시대가 되어 어찌 멸망시키지 않음으로써 예의 바른 지역을 오랑캐의 고을로 만들겠습니까? 지금 고구려의 사신은 계민(啓民)이 온 나라를 들어 모시고 따르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을 이용하여 사신을 위협해 입조하게 하십시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 8

 

그리고 구당서 권63 열전 13 배구에서도 배구의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구려의 땅은 본래 고죽국이고, 주나라가 기자를 봉한 지역이며 한나라때에는 3군을 설치하였던 곳이고 진나라때에는 요동을 통솔하게 한 곳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고구려를 한반도 북부와 만주일대를 차지하고, 서쪽으로는 지금의 요하를 넘지 못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당시 고구려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던 수나라에서는 고구려가 위치한 지역이 기자가 책봉을 받고 한나라때는 군을 설치했으며, 진나라때는 요동을 포함하여 다스렸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나라 시기에는 위만조선을 멸망시켜 영토를 넓히기는 했지만, 사마염이 세운 서진은 건국 초기부터 귀족들의 권력다툼으로 새로운 영토를 개척할수도 없었으며 오히려 지키기 급급했기 때문에 영토가 한나라때보다 크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지금 중국 역사학계에서는 고죽국의 위치를 북경인근에 있는 난하 지역으로 비정하고 있는데, 이것을 바탕으로 추측해봐도 고구려는 당시 난하 일대에 국경을 긋고 수나라와 대치했다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결국 이후 수나라 양제는 113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고구려를 공격합니다.

그런데 또 이상한 부분이 보입니다. 양제는 전군을 지금의 북경인근인 탁주에 집결시켜 출발했다고 하는데, 인용한 수나라의 군사들이 출발하는 부분이 탁군으로 추정되는 부근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있는 고구려의 국경인 요하까지는 한참 떨어져 있기 때문에, 굉장히 비효율적인 출발이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만약 정말 고구려의 국경이 지금의 요하라고 해도, 지도에 표시된 유성이나 회원진 같은 코앞에 있는 곳까지 가서 고구려로 출발하는게 더욱 효율적입니다. 그런데 북경인근의 탁군에 백만이 넘는 군대가 집결해 또다시 힘들게 진군하여 고구려를 공격했다는 사실은 납득이 잘 되지 않는 점입니다.

차라리 북경 서쪽에 있는 난하 일대에 고구려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면 오히려 탁군에 전군을 집결시켜 출발했다는 점이 납득될 정도입니다.

 

거기에 양제가 직접 작성했다는 포고문을 보면 이런 의문은 확신이 되어갑니다.

고구려 작은 무리들이 사리에 어둡고 공손하지 못하여, 발해(渤海)와 갈석(碣石) 사이에 모여 요동 예맥의 경계를 거듭 잠식하였다. 비록 한(漢)과 위(魏)의 거듭된 토벌로 소굴이 잠시 기울었으나, 난리로 많이 막히자 종족이 또다시 모여들어 지난 시대에 냇물과 수풀을 이루고 씨를 뿌린 것이 번창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저 중화의 땅을 돌아보니 모두 오랑캐의 땅이 되었고, 세월이 오래되어 악이 쌓인 것이 가득하다.

중략.....

방패를 가지런히 하고 갑옷을 살피고, 군사들에게 경계하게 한 후에 행군하며, 거듭 훈시하여 필승을 기한 후에 싸움을 시작할 것이다. 좌(左) 12군(軍)은 누방(鏤方)·장잠(長岑)·명해(溟海)·개마·건안(建安)·남소·요동·현도·부여·조선·옥저·낙랑 등의 길, 우(右) 12군은 점제(黏蟬)·함자(含資)·혼미(渾彌)·임둔(臨屯)·후성(候城)·제해(提奚)·답돈(踏頓)·숙신·갈석(碣石)·동이(東𦖮)·대방·양평(襄平) 등의 길로, 연락을 끊지 않고 길을 이어 가서 평양에 모두 집결하라.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8

 

이 기록을 보면 확실히 고구려의 위치가 확인됩니다.

고구려가 발해와 갈석 사이에 모여 요동과 예맥을 잠식했다고 양제는 말하고 있습니다.

발해는 지금의 발해만 일대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고, 갈석산은 난하 인근 장성이 시작되는 곳에 위치한 산입니다.

하지만 갈석산이라는 지명은 서쪽의 산서성과 하북성 일대에도 보이기 때문에, 과연 지금의 갈석산을 이때의 갈석으로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지금의 갈석산을 양제가 말한 곳이라고 해도, 고구려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 뿐만 아니라 수나라 원정군이 집결하여 모인 북경 인근까지 땅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지금의 난하 일대를 요동과 예맥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점도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가 알고있는 요동과 요서의 개념은 이후 성립된 요나라가 최초로 사용했고, 이것이 시간이 지나 명나라때 자리잡은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고구려는 절대 지금의 요하서쪽으로 넘어가지 않았다는 한국 역사학계는 이런 확실한 근거를 보고도 구당서와 삼국사기에 맞설만한 기록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미 고구려가 지금의 요하를 넘어 난하 일대까지 진출했음을 수나라의 황제와 대신이 말하고 있는데, 왜 이런 기록에는 전혀 주목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양제는 군사들의 진군로까지 정해주고 있습니다.

좌군은 누방, 장잠, 명해, 개마, 건안, 남소, 요동, 현도, 부여, 조선, 옥저, 낙랑을 거쳐 평양으로 오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군은 점제, 함자, 혼미, 임둔, 후성, 제해, 답돈, 숙신, 갈석, 동이, 대방, 양평을 거쳐 평양으로 집결하는 내용을 하달하고 있는 점도 주목해야 합니다.

 

우선 지금 한국과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평안도 평양에 낙랑군이 있었고, 이곳이 고구려의 평양이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수나라 좌군의 진군로를 보면 건안성과 남소성, 요동성을 거쳐 부여와 조선, 옥저 이후에 낙랑을 거쳐 평양으로 갈수 있다는 점을 알수 있습니다. 다시말해 평양과 낙랑이 분리된 지역이라는 것이며 이것으로 한국 역사학자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평양과 낙랑이 동일하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닌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한국 역사학계는 옥저를 지금의 함경남도 지방으로 비정하고 있는데, 만약 앞서 인용한 지도가 사실이라고 해도 요동반도를 지난 수나라의 좌군이 왜 함경남도를 거쳐 평양으로 와야하는지 의문이 듭니다. 역시 옥저가 함경남도라고 비정한 것 역시 사실이 아닌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만약 옥저가 함경도가 아닌, 대륙에 있었던 지명이라고 가정하면 수나라군이 왜 이곳을 거쳐가는지 설명이 됩니다. 결국 이렇게 옥저와 낙랑의 비정은 틀린것으로 보이며, 한국 역사학계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어보입니다.

 

거기에 이후의 기록인 송서를 살펴보면 고구려의 위치가 더욱 확실해집니다.

고려는 본래 고구려로, 우임금이 설치한 기주땅에 있었으며 주나라때는 기자의 땅이었고 한나라때 현토군이었다는 것입니다. 요동에 있었으며 부여의 별종이고, 평양을 도읍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송사 권487 열전 246 열전고려 항목에 있습니다.

확실히 이런 내용을 보면 고구려는 결코 요하를 넘지 못했다는 현재의 주장은 근거가 없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오히려 고구려는 서쪽으로 더욱 진출해 우리 생각보다 훨씬 큰 영토를 가진 대제국이었던 것입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