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진왕조를 10년간 괴롭힌 독발수기능의 난

2023. 7. 8. 11:16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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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연의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었던 조비의 한나라 찬탈은 결국 사마씨에게 위나라가 똑같이 찬탈당하면서 막을 내립니다. 그래도 이때는 선양하고 물러난 이전왕조의 군주들은 바로 죽지 않았고, 한나라의 헌제가 물러난후 천수를 누리면서 살았던것처럼 그래도 목숨은 부지하면서 살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위왕조를 빼앗은 사마염은 새로 진나라를 건국했고, 이것이 삼국을 통일하게 되는 서진왕조입니다.

하지만 서진왕조는 남쪽의 오나라를 바로 치지 못했고 10년이 넘는 시간을 그냥 허비하게 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삼국지연의가 자세하게 다루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모르지만, 서진은 북방 이민족의 반란으로 오나라를 치지 못했던 것입니다.

 

남쪽의 오나라에서는 마지막 폭군으로 유명한 손호가 한창 폭주하고 있었습니다.

총명하면서 말재주도 좋고 인품도 훌륭했던 자신의 동생 손준을 제거하는 것을 시작으로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만한 손씨 후손들을 전부 죽였으며, 옳은 말을하는 대신들마저 제거하고 죽이는것에 그치지 않고 간신들을 등용하여 그나마 남쪽에서 버티고 있던 오나라의 힘을 다른곳에 낭비중이었습니다.

그나마 삼국지연의 후반에 오나라를 떠받치던 육항의 활약 덕분에 당시 서진의 뛰어난 장수였던 양호도 쉽게 오나라를 치지 못했고, 그렇게 서진과 오나라는 대치하고 있던 것입니다.

 

그러는 와중에 북방의 감숙성, 삼국지연의에서는 서량이라고 표현했던 곳에서 이민족의 반란이 일어납니다.

독발부 선비족의 수장이었던 독발수기능은 270년 드디어 서진왕조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켜 저항했습니다. 

265년 위나라를 빼앗아 건국된 서진왕조는 곳곳에서 위나라의 유신들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는데 여념이 없었고, 그것 덕분에 온전히 서량지역에 신경쓸 여력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토벌군을 조직한 서진은 바로 진주자사 호열을 파견해 공격했지만, 만곡퇴전투에서 패하고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조정에서 호열을 돕기위해 파견된 유기는 호열을 돕기는커녕 멀리서 그가 죽는것을 바라만 보았다고 하니, 당시 서진군의 무능함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렇게 위협을 느낀 서진조정에서는 소유를 양주자사로 임명해 다시 싸우게 했지만 금산에서 또다시 패배했고, 그로인해 석감과 두예를 파견해 독발수기능을 진압하게 합니다.

두예는 나중에 오나라를 침공해 멸망시킨 인물로, 군사적인 역량이 탁월하면서 안목있는 인물이었지만 그 역시 이 지역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실패합니다. 함께 파견된 석감이 두예를 모함하여 파직된채 낙양으로 끌려갔다는 기록이 있는데, 아마도 싸움에서 패하고 모든 책임을 뒤집어쓴채 불려간것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결국 혼자남은 석감마저 싸움에 이기지 못하고 허위로 승리를 조작하다가 적발되어 소환되었고, 그렇게 독발수기능은 자신을 잡기위해 파견된 서진의 군사를 상대로 연전연승하며 한층 사기가 올라갑니다.

이것 덕분에 당시 사마염은 제대로 식사도 못할 정도로 두려움에 떨었다고 하니, 서량지역이 함락되면 장안을 비롯한 관중지역이 위험하고 수도였던 낙양마저 공격받을것을 염려했던 모양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많은 사람들은 이곳으로 파견되는 것을 꺼렸다고 합니다. 모사로 이름높았던 가충은 반란진압의 사령관으로 임명되고도 가지 않기 위해 자신의 딸을 사마염의 아들과 결혼시키며 낙양에 눌러앉았는데, 결국 이 딸이 훗날 서진왕조를 망치는데 일조하게 되는 가황후입니다.

 

이렇게 난이 평정되지 않자 명망있던 황족 사마준과 명장으로 이름을 날려 삼국지연의에서도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문앙이 관중지역에 파견됩니다. 사마준과 문앙은 관중일대에 농사를 권장하고 방어를 튼튼히 하면서 대치상태를 만들자 서서히 독발수기능도 이전과 같은 공격은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관중지역에 기근이 들어 유민들이 떠돌게 되고, 방어력이 약해진 틈을 타 견흥이 이끄는 서진군을 다시 청산에서 격파하며 진주와 옹주지역을 독발수기능의 선비족이 약탈하며 황폐화되고 말았습니다.

 

이때 사령관이었던 사마준이 경질되었다가 1년후 다시 돌아오게 되는데, 이때부터는 직접적인 싸움을 피하고 방어적인 태세로 나오게 됩니다. 싸움을 통해 서진군을 이기고 약탈로 군사들와 부족들의 사기를 올려온 독발수기능은 이때부터 힘을 잃기 시작했으며, 결국 황폐화되었던 관중일대를 복구하는데 성공하여 결국 독발수기능의 선비족은 위기를 맞이합니다.

274년부터 사마준은 곳곳의 선비족들을 격파하고 독발수기능의 주력군 3천명을 죽였으며, 곳곳에 위치하고 있던 중소규모의 이민족들을 토벌하면서 서서히 목을 조여들어왔습니다.

특히 277년 문앙이 이끄는 주력군이 선비족을 위협하자 이때 투항한 선비족의 숫자가 20여만명이었다고 하니, 이때 거의 독발수기능의 난은 평정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런 중요한 시기에 서진조정은 큰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때까지 반란을 막아내며 상황을 반전시킨 사마준과 문앙을 낙양으로 불러들인 것입니다. 아마 사마염의 입장에서는 이들이 큰 공로를 세우는것이 못마땅했을 것이며, 그것 때문에 반란군이 아직 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소환하지 않았나 추측해봅니다.

결국 막다른 길에서 살아난 독발수기능은 양주자사였던 양흔이 강족과의 싸움에서 패하고 전사하자 완전히 살아났으며, 양주일대를 전부 장악하는 쾌거를 올렸습니다. 아마 사마준과 문앙을 그대로 기용했으면 벌써 토벌당하고 패망했을 독발수기능의 선비족이었지만, 사마염의 결단으로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하지만 279년 정예병 3천명을 이끌고 진군해온 마륭이 제갈량의 팔진도를 이용한 전법으로 맞서자, 곳곳에서 패하고 도망가게 됩니다. 그렇게 쫓기던 독발수기능은 결국 부하의 배신으로 죽음을 맞았고, 서진왕조를 10여년 괴롭히던 독발수기능의 난은 이렇게 평정되면서 드디어 오나라를 공격할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 것입니다.

 

독발수기능의 난은 서북지역에서 일어난 이민족의 반란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오랫동안 지속되었습니다.

특히 서진왕조가 자랑하는 기라성같은 장군들이 투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전투에서 패배했고, 그나마 명망있고 능력있던 사마준과 문앙이 투입되어 한동안 방어를 잘 하고나서 상황을 반전시켰을만큼 오랫동안 서진왕조를 괴롭혔던 사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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