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6. 28. 12:33ㆍ역사
선비족이 세운 북주정권은 577년 고구려와 인접해있던 북제를 무너뜨렸습니다.
북제 역시 선비족에서 갈라진 국가였지만 내분으로 자멸했고, 그렇게 화북일대를 통일한 북주였지만 곧바로 권신이었던 양견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자신의 외손자에게 북주를 찬탈하여 수나라를 세운 양견은 587년 북주의 부용국이었던 후량을 멸망시켰고, 589년에는 강남지방에 버티고 있던 진나라를 공격해 멸망시킴으로써 오랜시간 이어져온 혼란을 마감하고 통일왕조의 길을 열었습니다.
그렇게 수나라를 세워 황제가 된 문제 양견은 나름 정치를 잘 해나갔습니다.
남북조시기 개발된 강남지방이 안정되자 이미 화북지역의 생산량을 넘어섰고, 이미 이 시기부터 중국전체 조세의 60퍼센트를 담당할 정도로 이전과는 비교되지 않는 강력한 경제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를 개황의 치라고 부르며 수나라의 전성기로 부르는데, 생각보다 인구가 많이 늘었고 경제도 좋아지다보니 곳곳에 건설한 창고에 곡식이 가득차서 더이상 넣지 못할 정도였다고 기록될 정도였습니다.
이런 강력한 경제를 바탕으로 수나라는 고구려와 대립합니다.
특히 신라의 진평왕이 보낸 원광법사가 걸사표를 가지고와 자신들을 구해줄 것을 간청하자, 문제는 고구려에 강력한 경고의 메세지를 보냈습니다.
수 고조(高祖)가 왕에게 새서(璽書)를 주어 질책하기를 “비록 번부(藩附)라고는 하나 정성과 예절을 다하지 않는다.”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그대의 지방이 비록 땅이 좁고 사람이 적다고 할지라도 지금 만약 왕을 쫓아낸다면 비워둘 수 없으므로 마침내 관청의 아전과 하인을 다시 선발하여 그곳에 가서 다스리게 해야 할 것이다. 왕이 만약 마음을 새롭게 하고 행실을 고쳐 법을 따른다면 곧 짐의 좋은 신하이니, 어찌 수고롭게 별도로 재주있는 사람을 보내겠는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7권에는 이렇게 수나라 문제의 조서를 인용하면서 고구려를 압박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미 진나라가 멸망할때부터 고구려는 수나라와의 일전을 각오하면서 수나라의 무기만드는 기술자를 빼오고, 군사력을 확충하는 노력을 통해 대비를 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이런 수나라의 경고를 받은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준비를 하고 있던 평원태왕이 죽고, 그 아들인 영양태왕이 고구려의 태왕으로 등극했습니다.
하지만 수나라의 태도가 변하지 않자, 고구려의 장군이었던 강이식이 나서 선제공격을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고구려의 장군인 강이식은 삼국사기를 비롯한 역사서에는 이름이 전해지지 않고, 오직 신채호가 저술한 조선상고사에 그 이름을 남기고 있습니다. 또한 강이식은 진주 강씨의 시조로 알려져 있으며 그 족보에 대략적인 발자취가 남아있습니다.
결국 본격적인 전쟁이 있기 전에 고구려가 수나라를 선제공격하게 됩니다.
강이식이 이끄는 고구려군 5만 보병과 말갈기병 1만명은 수나라의 임유관을 함락시키고 서쪽으로 나갔다가 수나라의 영주총관 위충과 교전하여 패하고 물러났습니다.
수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수서에서는 위충이 고구려군을 크게 이기고 격퇴했다는 내용이 적혀있긴 하지만 이미 국경지대는 초토화되었고, 먼저 공격당했다는 사실로 수나라 문제는 분노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이후 본격적인 고구려 원정군이 편성되었습니다.
문제의 다섯째아들 한왕 양량을 총사령관으로, 장군 왕세적이 이끄는 총병력 30만에 이르는 군대를 편성하여 598년 고구려를 공격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기세좋게 출발한 원정군이 전투를 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수서의 기록을 보면 장마와 태풍, 그리고 전염병을 만나 8할에서 9할에 이르는 군사들이 희생되었고 이후 철수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정확하지 않은 기록으로 보입니다. 구당서 두건적전에 보면 문제가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와 싸웠는데 오히려 패배했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이후 고구려를 공격하는 수나라 양제도 이시기를 돌아보며 당시 재상이었던 고경의 지략이 모자라 패배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결국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투가 있었고, 이 싸움에서 수나라의 정예병들이 패배한 것으로 보입니다.
거기에 앞서 인용한 구당서 두건덕전에서는 문제가 100만의 군사를 동원했지만 패했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정말 철저히 수나라군이 강이식 장군이 이끄는 고구려군에게 패배했던 모양입니다.
이런 패배의 원인을 날씨와 전염병으로 돌리고 있지만,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장마와 태풍을 피하지 못하는 시기에 출병한 수나라의 잘못일 것이며 오히려 시기를 잘못 선택한 총사령관 양량과 왕세적이 처벌받아야할 일일 것입니다.
거기에 주라후가 이끄는 수군이 전선을 동원하여 육군에 군량을 보급하며 평양 기습을 노렸는데, 이것 또한 고구려의 정예수군이 공격하여 이겼다고 하니 수나라의 입장으로서는 많은 군사를 동원하고도 패한 전쟁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고구려 원정에 나섰던 수나라군은 결국 현실을 인정하고 후퇴하게 되는데, 이때 강이식이 이끄는 고구려군이 뒤를 공격하여 임유관 일대와 국경일대가 수나라군의 시체로 가득했다고 합니다. 역시 이런 내용은 삼국사기에 기록되지 않고, 조선상고사에만 남아있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수사에 남은 기록애 따라 정확한 30만의 병력인지는 모르겠지만, 수나라 전군이 거의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확실히 수나라의 1차 고구려 침입은 완전히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다만 수나라 문제는 확실히 명군의 자질이 있던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불필요한 고구려 원정을 중단하고, 이후 남쪽의 베트남에 출병하여 국왕을 잡아 죽이며 다시 영토로 편입했고 백성을 휴식시키는 정책을 통해 수나라가 입은 큰 상처를 치유해 나갔던 것입니다.
그렇게 다시 회복된 국력을 바탕으로 양제가 또 고구려를 침공하지만, 적어도 문제는 고구려에 국력을 쏟아붓지 않았으니 아들인 양제보다는 훨씬 능력있는 군주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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