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8. 3. 22:01ㆍ역사
이성계가 쿠데타로 고려왕조를 뒤집어엎고 건국한 조선왕조는 성리학을 토대로 세워진 국가였습니다.
원래 성리학은 송나라가 북방의 이민족인 여진에게 패하고 남쪽으로 쫓겨내려갔을때 한족들이 그들의 정신승리를 위해 자신들만이 정통이라는 사상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물론 송나라의 이전시대인 당나라 시절에는 도교와 불교가 융성하면서 그들을 견제하기위해 만들어낸 사상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긴 하지만, 이런 성리학을 고려의 유학자들이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우리역사는 비극적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조선왕조는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유연한 사고를 가졌던 세종 이외에는 모두가 성리학만을 위하는 군주들이 집권했고, 그나마 세조이후 어수선했던 상황을 수습한 성종마저도 성리학만 우대할뿐 불교나 우리 전통의 단군교같은 사상들은 탄압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결국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성리학에만 지나치게 매달리는 경향을 보여줬고, 능양군의 쿠데타 이후 집권한 서인세력은 특히 성리학에 병적으로 집착하면서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려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는 사회분위기에 반기를 든 사람이 바로 윤휴입니다.
그는 1617년 태어난 북인계열의 인물이었지만, 나중에 북인이 인조반정으로 몰락한후 벼슬길이 막혔을때도 서인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학문적인 교류를 해왔다고 합니다.
특히 송시열과 개인적인 친분이 두터웠는데, 병자호란 당시에 인조가 굴욕적인 항복을 하는 상황을 비판하며 둘다 벼슬을 하지 않고 함께 학문적으로 교류하면서 더욱 친해졌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둘의 사이는 오래가지 못하고 깨지게 됩니다.
윤휴는 성리학을 집대성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한 주자에 대해 공로는 인정하나, 주자의 해석에만 매달리지 않고 자신만의 새로운 해석과 발전을 언급하고 나섰습니다.
이에 대해 주자에 대해 병적으로 집착하던 송시열은 당장 이런 윤휴의 주자 비판에 대해 발끈하고 나섰고, 결국 성리학을 비판하고 나선 윤휴를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이름으로 낙인찍어 비판하고 나서게 됩니다.
이후에도 송시열은 윤휴의 견해를 물었지만 '주자가 아는것을 왜 나는 모른다고 하는가' 라는 말을 남기며 주자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송시열은 그와 절교를 선언했고, 후에 송시열이 효종과 현종 시기 재야의 큰 인물로 인정받으며 입지가 탄탄해지면서 더욱 사문난적이라는 공격에 타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결국 숙종시기인 1680년 역모에 연루되어 사약을 받고 윤휴가 죽게 되는데, 이후 그의 손녀사위였던 이인좌 역시 반란에 가담하여 싸우다가 붙잡혀 처형당하는 바람에 완전히 집안자체가 역적의 가문으로 전락해버렸습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윤휴는 억울한 면이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유교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고, 주희와 다른 견해로 유교 경전을 해석하고 자신만의 견해를 드러내려는 노력을 한것 뿐인데 하필 주자를 신처럼 신봉하던 송시열에게 찍혀 사문난적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것입니다.
조선 후기 이미 낡은 성리학을 버리고 명나라 말에 새롭게 일어난 양명학을 도입하여 실사구시 정신을 강조했어야 하는 중요한 시기에, 성리학을 가지고 의미없는 논쟁으로 힘만 낭비한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후손들에게 비판받아도 할말은 없을거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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