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8. 30. 12:46ㆍ역사
팔왕의 난이 끝난후, 실권은 동해왕 사마월에게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당시 황제였던 회제 사마치는 사마월이 설치는 꼴이 보기 싫었고, 그래서 사마월을 제거하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팔왕의 난이 끝난후 사마월이 후계자 선정에도 관여하여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을 죽이고 황제의 측근들을 제거하며 감시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당시 회제에게도 어떤식으로 대했을지 충분히 알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때 상황은 굉장히 급박했습니다.
팔왕의 난 당시에도 진나라의 지배계급들은 자신들끼리 싸우는것도 모자라 국경밖의 선비나 오환 등의 군사를 용병으로 불러와 권력쟁탈에 이용했고, 이로 인해 서진의 국경은 방비가 소홀해지고 정예군은 소모되어 국가가 완전히 허술해지는 결과를 낳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북방의 이민족들이 호시탐탐 서진왕조를 노리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컸던 흉노의 유연이 이끄는 세력은 서진의 북방세력들을 흡수하며 공격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서진왕조의 통치에 반대하는 반란이 곳곳에서 일어났고, 그 덕분에 서진의 역량은 더욱 약화되었습니다.
그나마 북방민족을 온전히 상대할수 있었다면 어느정도 버티었을지도 모르지만 곳곳에서 일어난 농민반란 덕분에 방어할수 있는 힘이 분산되었던 것입니다.
308년 한나라를 세우고 황제를 칭하면서 세력을 키운 유연은 결국 309년 서진의 수도인 낙양을 대대적으로 공격해 들어왔습니다. 사마월이 왕광에게 군대를 맡겨 유연을 막게 했지만 대패했고, 낙양을 포위하면서 공격하다가 의양에서 패배하고 물러나 서진으로서는 한숨을 돌릴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유연이 죽고나서 황제를 계승한 유총은 다시 서진을 공격하게 되는데, 이런 과정에서 사마월이 병에 걸려 죽고 말았습니다. 그나마 동분서주하던 사마월이 죽자 그가 데려온 사람들은 사마월의 시신을 가지고 낙양을 떠났는데, 도중에 이민족 장수인 석륵에게 습격당해 10만이 넘는 사람들은 모두 학살당하고 사마월의 시신은 관에 들어있는채로 불태워지는 결과를 맞고 말았습니다.
311년 유총이 석륵과 왕미를 시켜 다시 낙양을 포위했고, 이미 10만에 가까운 인원이 빠져나간 낙양은 도저히 방어할 방법이 없어보였습니다. 각지에서 근왕군이 올라오기는 했지만 유총에 의해 격퇴당했고, 그나마 근왕군을 보내지 않은 봉국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311년 4월 결국 버티던 낙양은 함락되었고, 황제였던 회제 사마치는 유총에게 항복하면서 서진왕조는 막을 내렸습니다.
낙양이 함락되면서 2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학살당했고, 동탁이 불태운 이후에 꾸준히 재건되어 이전의 화려함을 찾았던 낙양은 다시한번 불에 타버리며 폐허로 변했습니다.
그 후에는 장안에서 민제 사마업을 황제로 한 서진의 망명정부가 들어섰지만, 316년 장안이 함락되면서 서진왕조는 결국 비참하게 멸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포로로 잡혀간 회제 사마치와 민제 사마업은 유총의 궁에서 술을 따르고 사냥갈때 창을 들고 경호하는 노예생활을 하다가 결국 모두 살해당했다고 하니, 사마씨가 그렇게 숱한 피를 흘리며 창건한 국가는 이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그나마 남쪽으로 내려간 낭야왕 사마예의 손에 의해 강남지방을 보존하여 동진왕조가 시작되었으니, 진나라가 완전히 멸망하지 않은것이 다행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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