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를 괴롭히던 왜구를 격퇴한 척계광

2023. 6. 13. 12:11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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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를 다시 부흥시킨 효종 홍치제가 죽은후, 그의 아들인 무종 정덕제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홍치제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었고, 10대에는 괜찮은 자질을 보여준 정덕제였지만 결국 개망나니같은 본색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나라가 어찌되든 놀고먹는 일에 몰두한 정덕제는 환관들에게 정사를 미루어놓고 즐기기에 바빴으며, 결국 배를 타고 놀던 와중 배가 뒤집어지며 물에 빠진이후 회복하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맙니다.

 

정덕제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그렇게 명나라의 황통이 끊어지는듯 했지만 정덕제의 사촌동생이었던 세종 가정제가 즉위합니다. 즉위할때는 명석한 두뇌와 사리판단으로 성군의 자질이 있었다지만, 세종이라는 시호가 아까울 정도로 가정제는 명나라를 크게 망치고 말았습니다.

가정제는 황제가 되고나서 자신의 아버지를 황제로 추대하는 과정에서 많은 신하들을 변방으로 내치거나 제거해버렸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명망있고 청렴한 신료들이 쫓겨났고, 그 자리를 엄숭을 비롯한 간신들이 채운채 명나라를 뒤흔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는 와중에 북방의 타타르가 침입하고, 남쪽에서는 왜구가 명나라의 후방을 약탈하고 습격하여 조정의 큰 근심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북로남왜라고 부르며,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채 그때그때 대응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남쪽에서 왜구가 준동할 무렵, 혜성처럼 등장한 장군이 있었습니다.

산동출신의 척계광은 이미 1549년 산동성 등주에서 장군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북방으로 파견되어 타타르를 막는 활약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 남쪽에서 왜구가 워낙 피해를 크게 입히자 척계광이 파견된 것입니다.

 

이 시기의 왜구는 이전의 왜구와는 성격이 많이 달랐습니다.

이전의 고려와 원나라를 괴롭히던 왜구는 활발하게 움직여 주로 약탈과 살인, 방화를 일삼으며 활동했습니다. 그래서 그때의 왜구는 원나라의 수도였던 대도 부근까지 올라가 약탈과 살인을 일삼았고 결국 이것을 막지 못한 원나라는 명나라에게 패하여 북쪽으로 쫓겨가는 원인중 하나가 될 지경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16세기 무렵의 왜구는 이전과는 성격이 다르게, 주로 중국대륙 남쪽에서 활동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물론 조선에도 왜구가 침입하여 삼포왜란이나 을묘왜변같은 난리가 벌어지기도 했지만, 중국 남쪽 절강이나 강소 등지에 출몰하던 왜구는 순수한 왜구가 아닌 명나라인들도 포함된 도적같은 개념이라고 보는게 타당합니다.

 

명나라 정덕제 이후, 사회가 어지러워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토지와 집을 잃고 떠돌았는데 이들이 결국 흘러들어간 곳이 산이나 바다에서 출몰하던 도적떼였습니다. 특히 명나라 정부의 힘이 약해지고 지방까지 일일이 통제할수 없게 되자, 원천적으로 무역을 막던 명나라 조정에 맞서 밀무역으로 큰 재산을 모은 이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렇게 밀무역으로 돈을 번 이들은 왜구와 손을 잡게 됩니다. 왜구들이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약탈해온 물건을 이들이 구입하고, 부족한 물자를 보급해주는 등 지방세력과 결탁한 왜구는 더욱 광대한 지역에 피해를 입혔으며 결국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척계광이 파견된 것입니다.

 

하지만 명나라 정예군은 수도인 북경을 방어하기 위해 북쪽에 몰려있었고, 주로 지방군으로 수비할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거의 농민들로 이루어진 명군은 전투력이 형편없었습니다. 그래서 척계광은 왜구 한명당 명군 12명을 투입하는 원앙진을 새로 개발하여 싸우게 됩니다.

이때 만들어진 원앙진은 12명이 한몸처럼 협력하여 싸우는 방식인데, 만약 한명이라도 죽게되면 모두가 처형될 정도로 엄격한 군율속에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서로가 협력한 상태로 수비와 공격이 이루어지고, 철저한 훈련끝에 단련된 병사들이 왜구를 압도하기 시작하면서 결국 본격적인 왜구토벌이 시작됩니다.

 

1561년 대주에 상륙한 왜구의 토벌을 시작으로 1562년에는 다시 공격해온 왜구와 2년을 싸워 승리했다고 합니다. 

이미 1년전 5천명의 왜구를 죽인 척계광이었지만 2년간 싸우면서 또다시 2600명의 왜구를 죽이고 곳곳에 숨이었던 왜구의 진지 60여개를 격파했다고 하니 단시간에 엄청난 성과를 거둔 것입니다.

그리고 1563년에는 평해위에서 왜구를 크게 이기고 총사령관이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광동에 침입해온 왜구를 토벌하여 대륙의 동남해안가에서 왜구를 찾아볼수 없을 정도로 평화를 되찾을수 있었습니다.

 

마침 가정제가 죽고 융경제가 그 뒤를 이었는데, 북방에서 활동하던 타타르를 대비하기 위해 척계광이 북방으로 올라갑니다. 이후 10년간 계주에서 장성을 수리하고 몽골과 싸운 척계광은 남쪽을 안정시킨 것처럼 북방에서도 활악하여 그가 장군으로 있을 동안에는 북방민족들이 명나라를 공격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척계광은 융경제의 뒤를 이은 만력제때 실각하게 됩니다. 당시 실권자였던 장거정의 천거와 비호를 받으며 북방에 주둔하던 척계광이었지만, 장거정이 죽고 그의 정적들이 공격하게 되면서 결국 자리에서 쫓겨나 말년에는 병으로 고통받으며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고 전해집니다.

 

그렇게 좋지 않은 말년을 맞은 척계광이었지만, 그가 남긴 병법서인 기효신서는 조선에 전래되어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특히 왜구를 막기위한 병법이었기 때문에 조선에서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고, 이후 훈련도감의 창설 등에도 영향을 주었을 정도로 우리 역사에서도 중요한 인물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전래된 기효신서를 바탕으로 재편된 조선군의 모습이 갖추어졌고, 그것을 바탕으로 정조시절 무예도보통지라는 병법서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척계광은 역사에 이름이 길이 남을 명장으로 기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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