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를 뒤흔든 뇌물의 난

2023. 4. 26. 13:46역사

반응형

명나라에서 오랜만에 나온 제대로 된 황제였던 효종 홍치제는 힘든 시기를 살아왔고, 재위기간동안 너무 열심히 정치에 매달린 탓인지 즉위한지 18년만인 34세라는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 뒤를 이어 아들이었던 무종 정덕제가 즉위했는데, 호부견자라는 말이 어울리는 망나니같은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황제였지만 자유로운 삶을 추구했던 정덕제는 표방이라는 이상야릇한 건물을 세워놓고 온갖 진귀한 화초와 희귀한 동물을 키웠으며, 이곳에 궁녀들을 모아놓고 향락을 즐겼다고 합니다.

거기에 자신을 황제가 아닌, 대장군 주수라는 제 2의 인격으로 설정하고 직접 변경으로 출동하여 군사들을 사열하는 한편 주수의 공을 기린다면서 직접 녹봉을 내리는 등 범상치 않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또한 명나라는 영락제 시절 조카를 죽이고 황제가 된 영락제가 주변의 신하들을 전부 제거하고 자신의 인물들로 황제 친위세력을 키우면서 환관의 힘이 커졌습니다. 물론 영락제 시기에 대함대를 이끌고 원정을 떠난 정화같은 충성스러운 환관도 있었지만, 불과 몇십년 전에 토목의 변이라는 망신을 당하게 한 왕진 역시 황제를 끼고 국정을 농단했던 환관이었습니다.

물론 정덕제 시기에도 유근이라는 환관이 나타나 정사를 도맡아 처리했으며, 그것 때문에 더욱 정덕제에게 정치에 대한 흥미를 잃게 만들고 노는데만 집중하게 유도한 인물입니다.

 

유근이 국가를 좌지우지하게 되자, 기다렸다는 듯 홍치제 시기에 억눌려있던 환관세력들이 발호하기 시작했고 중흥의 길을 걷던 명나라는 다시 쇠퇴의 길을 걷게 됩니다. 곳곳에서 환관들이 뇌물을 받으며 정부가 썩어들어갔고, 이런 뇌물을 마련하기 위해 지방관들은 백성들을 다시 쥐어짜는데 전념하게 되니 명나라가 제대로 돌아갈리 없었습니다.

 

정덕제가 집권한지 5년이 되던 1510년, 당시 지방에는 수탈과 폭정을 피해 떠돌아다니는 백성들이 많았고 이들이 손쉽게 도둑이 되어 다른 양민들을 착취하는 악순환이 반복중이었습니다. 

유육과 유칠 형제는 유총과 유신이라는 본명을 가지고 있었지만 워낙 의협심이 있고 용맹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지방관들이 이들을 채용하여 치안업무를 맡길 정도로 믿음직스러운 인물들이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당시 유명했던 도둑들을 검거하고 일망타진하는 공로를 세웠고, 그것 덕분에 표창까지 받을 정도로 국가에 순종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는 유근을 비롯한 환관들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으면 이런 공로를 인정받지 못할 정도로 사회기강이 엉망이었다고 합니다. 유육과 유칠 형제는 환관들에게 바칠 돈이 없었기 때문에 환관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한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유근의 측근이었던 양홍은 이들 형제에게 뇌물을 요구했지만 청렴했던 이들에게 거절당했고, 앙심을 품은 양홍은 조정에 이들 형제가 반란을 일으킨 도적이라면서 오히려 죄를 뒤집어씌우게 됩니다.

국가를 위한 공로를 세웠지만 오히려 도적으로 낙인찍히면서 쫓기게 된 형제는 진짜 도적이었던 장무에게 도망쳐 의탁하게 되는데, 마침 환관들이 판을치던 명나라여서 그랬는지 그 뒤로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세력을 키울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 명나라 조정에서는 군대를 편성하여 이들을 토벌하기 위한 군사작전을 감행했는데, 정식 군대를 이기지 못할것으로 예상한 도적들과 유씨 형제는 뇌물로 다시 타협하게 됩니다. 국가에 바칠 2만냥과 유근에게 직접 바칠 1만냥의 은을 마련하여 항복하기로 했지만 막대한 은을 구할길이 없자, 이들은 결국 국가의 창고를 털 계획을 세웁니다.

가만히 일하게 두었으면 국가를 위해 일했을 공무원들이 오히려 뇌물을 바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국가에 반기를 들었으니, 명나라의 그때 사회기강이 어떤 수준이었는지 알수 있을 정도입니다.

 

처음에는 뇌물을 마련하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사람들이 몰려들고 세력이 커지자 이들은 결국 반란을 일으킵니다.

수도 북경 인근의 북직례를 공격한 이들은 조수라는 사대부를 끌어들이게 되는데, 이때부터는 환관세력을 타도하자는 기치를 내걸고 반란의 성격이 조금 변하게 됩니다. 이전에는 그저 약탈과 파괴를 일삼던 반란군이 조금이나마 정의를 논하는 군대가 된 것입니다.

명나라 조정은 위기를 느끼고 군대를 파견하지만, 싸울 생각이 없던 지휘관들은 반란군을 회유하여 진압하려 하였고 그렇게 반란군의 기세는 높아져만 갔습니다. 특히 군대를 둘로 나누어 한쪽은 산동지방으로, 남은 한쪽은 하남을 거쳐 강소와 호북성 일대로 공격을 시작하여 곳곳을 황폐화시켰고 약탈이 극심하여 폐허가 된 지방들이 즐비했다고 합니다.

 

이들이 한창 세력을 키울무렵에는 20만에 가까운 군대를 보유할 정도로 명나라 중심부를 완전히 초토화시켰으며, 이들을 진압하기 위한 정부군들도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막강한 세력을 자랑했습니다.

명나라 정부군은 반란군과 싸우지도 못하고 물러났으며 지휘관이 교체되었음에도 쉽게 이들을 제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승전을 가장하기 위해 일반 백성들을 공격하여 반란군을 죽인것처럼 포장하였고, 반란군은 정부군을 피해 달아나는 과정에서 백성들을 볼모로 삼았기 때문에 무고한 백성들의 피해만 늘어날 뿐이었습니다.

 

결국 명나라 정예병이 주둔한 대동과 선부 일대에서 차출된 군대의 공격으로 반란군이 밀리기 시작하였고, 그 과정에서 유육은 익사하고 유칠은 자살하였으며 반란군의 책사역할을 하던 조수는 사로잡혀 북경으로 압송된후 목이 달아나게 됩니다. 그렇게 힘들게 1512년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명나라 한복판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국가재정은 파탄나게 됩니다.

명나라 조정이 반란 진압을 위해 2백만냥의 은을 사용해야 했으며, 반란군이 휩쓸고 지나간 지역은 전부 황폐화되고 사람들이 죽어 한동안 재정이 고갈되었을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고 하니 당시 명나라의 형편이 어땠을지 짐작도 되지 않을 지경입니다.

 

환관들이 뇌물을 조금 덜 받았더라도 일어나지 않았을 유육과 유칠의 난은 명나라의 재정을 고갈시켰고, 조세재정에 크게 기여하고 있던 하남과 산동, 강남 일대를 초토화시킨 큰 사건이었기 때문에 더욱 어이없는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이후 정덕제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유근을 총애하며 노는데 여념이 없다가 결국 반란을 일으킨 유근과 일당들을 제거하게 되는데, 유근이 축재한 재산만해도 명나라 조정의 몇년치 세입이 넘을 정도로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다고 전해지니 이런 대규모의 반란이 일어난 이유를 충분히 알듯한 느낌이 듭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