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치열하게 싸웠던 후한과 고구려, 그리고 부여

2023. 3. 29. 13:12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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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고조 유방이 세운 한나라는 흉노를 정벌하고 사방을 침략하는것이 일상이었던 무제 이후 침체기를 겪다가, 선제라는 명군이 나타나 국가를 안정시키는 업적을 이루었지만 그의 아들인 성제가 모든 업적을 뒤엎는 암군이었던 까닭에 다시 국운이 쇠퇴하게 됩니다.

그러는 와중에 나타난 외척 왕망은 한나라를 찬탈하고 자신의 외손자에게서 황제자리를 선양받았으며, 신나라를 세우고 급격한 개혁을 통해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려 했지만 운이 너무나도 좋았던 유수에게 패하고 다시 한나라가 들어섭니다.

 

그렇게 들어선 후대의 한나라를 이전과 구분해 후한, 혹은 동한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데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삼국지에 등장하는 한나라가 바로 후한입니다.

우리는 흔히 후한이 말기에 각지에서 일어난 군웅할거와 농민반란으로 멸망했다고 알고있지만, 생각보다 후한의 몰락을 앞당긴 것은 고구려를 비롯한 우리 민족의 항쟁 덕분이었습니다.

 

한나라가 찬탈자 왕망을 처치하고 각지에서 일어난 지방세력들과 싸우고 있을무렵, 고구려는 낙랑지역을 공격해서 차지했습니다. 고구려 3대 태왕인 대무신태왕은 낙랑국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우리에게도 유명한 호동왕자를 이용해 낙랑국의 자명고를 찢어 낙랑을 점령했으며, 낙랑국의 유민들은 이때 많은 인원들이 신라로 들어가 귀순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한나라가 정비된후에는 고구려와 후한의 치열한 싸움이 전개됩니다. 광무제가 보낸 군사들이 낙랑군 일대를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는것을 보면 전쟁 덕분에 잃어버렸던 변경지역을 이때 후한이 다시 차지하기 위해 고구려를 공격한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대무신태왕 11년에는 한나라의 요동태수가 위나암성을 공격해왔지만, 신하였던 을두지의 전략으로 한나라군을 무찔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이때부터 본격적인 싸움을 치렀던 것을 알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후에는 공수가 다시 전환되어 고구려가 후한의 변경지역을 공격합니다.

특히 모본태왕 재위시절에는 한의 변경이었던 북평,어양,상곡,태원 등지를 공격하였는데 이 기사는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에서 만든 한나라의 요동과 요서를 표시한 지도를 살펴보면, 한나라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낙랑군을 비롯한 4군을 설치했다면서 그들의 영역을 지금의 평안도와 황해도까지 표시해놓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것이며, 모본태왕이 공격에 나섰다는 기록과 전면적으로 맞지 않는 내용인것입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모본태왕 2년에 장수를 보내어 북평,어양,상곡,태원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후한서 광무제본기 역시 요동 변방의 맥인들이 북평,어양,상곡,태원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삼국사기의 기록은 신빙성있는 내용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있는대로 고구려가 압록강 바로 위에 있던 국내성에 있었다면 거의 2천리를 행군하여 지금의 북경일대인 북평과 산서성에서 가장 큰 도시인 태원까지 공격할수 있었을지는 의문이 듭니다. 고구려가 최소한 지금의 요녕성이나 하북성 일대에 위치해야만 원활한 공격이 가능하니, 우선 고구려 위치에 대한 비정이 다시 변경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렇게 북경 일대를 공격한 고구려는 당시 요동태수였던 제융의 화친요청을 받고 철수했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만 정말 화친했을리는 없을것이고, 막대한 물자와 뇌물을 받고 물러났을 것입니다.

후한서 역시 구려가 쳐들어왔을때 제융이 은신으로 부르니 와서 항복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은신이라는 것은 아마 뇌물을 뜻하는 기록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아마 당시 요동태수에게 뜯어낼수 있을만큼의 물자와 보물을 받아냈을 것으로 보이며, 한동안 고구려가 모본태왕이 시해당하는 사건 덕분에 어지러웠기 때문에 요동군은 큰 위기를 넘길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본태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태조태왕은 능력있는 군주였으며, 나이는 어렸지만 유능한 신하들을 등용하여 고구려를 다시 강국으로 만들었습니다.

특히 이 시기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요서에 10개의 성을 쌓아 한나라의 침입에 대비했다고 할만큼 한나라와 적극적으로 싸운 시기이도 합니다. 후한서는 태조태왕을 용맹하고 건장한 외모를 가지고 있으며 자주 변경을 침입해 어지럽혔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을만큼 정말 자주 부딪혔던 것을 알수 있습니다.

 

서기 105년에는 요동군을 공격하다가 요동태수 경기에게 고구려군이 패했다는 기록이 있고, 112년에는 예맥과 현토군을 공격했으며 121년에는 요동태수 채풍이 현토태수와 유주자사의 군대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공격하자 대치하면서 비어있는 낙랑군을 공격하여 승리하는 와중에 채풍을 습격하여 죽이고 그의 처자까지 전부 사로잡았다는 기록이 있으니 이때부터 고구려의 우위가 굳어지는 모양새가 됩니다.

다만 이후 태조태왕이 노환으로 물러나고 차대태왕이 시해당한후 신대태왕이 즉위하는 과정에서 다시 한나라군이 쳐들어왔습니다. 당시 재상이던 명립답부는 처음으로 청야전술을 시행하여 원정온 한나라군의 보급을 끊고 성을 지키다가 좌원이라는 곳까지 기병으로 추격하여 한나라군이 크게 패하고 한필의 말도 살아돌아가지 못할만큼의 대승을 거두었다고 하니, 가뜩이나 어려운 후한의 사정상 더이상 고구려를 공격하지 못하고 수세로 일관하게 됩니다.

 

특히 후한은 갈수록 정치가 어지러워져 외척인 양씨 일족이 권력을 잡고 질제를 독살하는 등 권세를 누리다가 환관들에 의해 제거된후 십상시로 대표되는 환관세력에 의해 장악되었으니, 더욱 고구려를 비롯한 세력들의 공격에 제대로 대응할수 없었습니다. 

 

https://youtu.be/dTJ4DoPk3hc

하지만 후한과 치열하게 싸운것은 고구려 뿐만이 아닌듯 합니다.

서기 111년 3월에 부여 보병7천과 기병 8천을 동원해 국경을 넘어와 낙랑을 노략질하고 관리들을 죽였다는 후한서의 기록을 살펴보면, 고구려 뿐만 아니라 부여 역시 한나라와 끊임없는 전쟁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뭔가 이상합니다. 흔히 고구려의 북쪽에 있었던 것으로 비정되는 부여인데 어떻게 고구려를 넘어서 내려와 한의 낙랑을 공격하고 관리를 죽일수 있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마 고구려와 부여 모두 지금의 위치보다는 좀더 서쪽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야 고구려가 북경일대와 산서성까지 공격할수 있고, 고구려를 거치지 않고 낙랑을 공격하는 부여군의 진격이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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