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3. 16. 14:27ㆍ역사
우리가 알고있는 정승 황희는 이름값에 비해 그렇게 인간적인 면에서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사위였던 서달의 살인사건을 은폐하려다가 세종에게 적발되어 파면되었던 적도 있고, 그의 장남과 서자들은 재물을 밝히다가 여러차례 적발되는 등 고위공직자로서는 여러가지 부적절한 사건에 휘말린 것이 한두건이 아니라 세종 밑에서 재상을 오랫동안 지낸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깎아먹은 측면이 있습니다.
그렇게 황희가 오랫동안 정승으로 있다가 문종 시기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후 태어난 그의 후손은 황희의 악명을 전혀 닮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의 도움없이 자신의 능력만으로 자수성가하게 됩니다.

황진은 1550년 전라도 남원에서 황희의 5대손으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조선이 상당히 쇠퇴하던 명종시기에 태어났기 때문인지, 재상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음서로 관직에 나가지 않은것을 보면 아마 그의 집안이 권세를 더이상 누리지 못하고 밀려났던 모양입니다.
그래서인지 황진은 학문을 익혀 문반이 되지 않고, 열심히 무예를 익혀 무과에 급제해 오히려 무반의 길을 걷게 됩니다.
당시 황진이 무과시험에 합격했을때, 함께 합격한 사람이 나중에 황진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이종인이었으니 정말 선조시기에는 온갖 인재들이 넘쳐나는 시기였던듯 합니다.
무과에 합격한 황진은 북방에서 경력을 시작했고, 임진왜란 직전의 큰 난리였던 니탕개의 난에도 참여하여 전공을 세우는등 여진족 토벌에서 경험을 쌓아나갑니다.
이후 일본에 사신을 보낼때 사신들을 호위하는 역할로 일본에 파견되었는데, 당시 일본을 통일한 히데요시를 만나본후 반드시 전쟁이 있을거라는 것을 예측하여 일본도를 구입하여 무예에 정진하였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난후 쓰여진 선조수정실록에서도 황진이 황희의 5대손이며, 일본을 다녀온후 무예를 열심히 수련했다는 내용이 있는것으로 보아 이점이 당시 위정자들에게도 알려졌던 모양입니다.
그 후에는 동복현감에 임명되어 부임하다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라도의 근왕군을 이끌고 한양을 수복하는 작전에 참여합니다. 다만 이들을 이끌던 전라도 관찰사 이광이 변변치 않은 인물이었기 때문에, 와키자가 야스하루가 이끄는 기병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용인전투에서 모든 조선군이 무질서하게 패주할 때도 그나마 권율과 황진이 이끄는 조선군만은 온전히 전력을 보존하여 퇴각했다고 하니 그들이 근왕병을 이끌지 않은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렇게 근왕병들이 패한 이후에는 왜군이 전라도로 들어가기위해 몰려들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총애하던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이끄는 정예군이 전주를 점령하기 위해 웅치와 이치로 공격해왔습니다.
웅치에서는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고 정담이 전사했으며 이복남이 조선군을 이끌고 방어했지만 결국 패하여 전주 근처로 물러났는데, 인덕원 부근에서 황진이 군사를 이끌고 공격하여 결국 왜군을 격파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치에서 권율과 함께 왜군과 싸웠는데, 황진이 활을 당겨 수많은 왜적을 쏘아 죽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치열하게 싸우던 와중에 왜군의 집중공격에 황진이 부상을 입었을때 조선군의 사기가 떨어지며 돌파될 위기에 놓였지만, 권율이 싸움을 독려하여 간신히 승리를 거둘수 있었다는 후일담이 전해집니다.
그렇게 전라도에 진입하던 왜군을 막아세웠으며, 조선 팔도가 왜군에 짓밟히던 와중에 그나마 전라도를 보존할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벌어진 이순신의 제해권 장악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당시 황진의 목숨을 건 전투에 재평가가 필요한 것입니다.
웅치와 이치의 싸움에서 큰 전공을 세웠기 때문에 황진은 바로 전라도 조방장 겸 정 3품 당상관인 통정대부로 승진합니다.
당시에는 서인과 동인으로 나뉘어 당파를 잘 타야 출세할수 있었지만, 오직 자신의 능력만으로 이렇게 초고속으로 승진했던 황진의 전공이 새삼 놀라울 뿐입니다.
그 후에는 죽주산성에 은거하고 있던 일본내에서 유명한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치열한 전투를 펼칩니다.
거듭된 기습과 싸움으로 결국 산성내에 있던 왜군을 밖으로 이끌어냈고, 매복하고 있다가 이들을 격파하고 빈집이 된 죽주산성을 탈환했다고 합니다. 겨우 천명 남짓한 병력으로 칠본창이라는 명성을 얻고있던 후쿠시마 마사노리에게 승리를 거두었으니, 당시 조선 조정의 지원만 좀더 있었으면 황진이 더 큰 전공을 세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이런 전공을 바탕으로 충청병사로 승진했습니다.
전쟁이 처음 시작할때는 동복현감이라는 작은 직책이었지만 결국 충청도 지역의 방어를 책임지는 충청도 병마사의 자리에 올랐으니, 정말 고속 승진을 거듭한 이순신과 비슷한 출세가도를 달린 것입니다.
https://www.jinju.go.kr/02232/02818/02237.web?amode=view&idx=605
진주성명소 | 진주관광
www.jinju.go.kr

하지만 왜군이 한번 패하고 물러났던 진주성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고, 특히 히데요시가 진주성의 패배에 집착하면서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여 진주를 공격해왔기 때문에 다시한번 진주를 지키기위한 전투에 참여합니다.
성안에 있던 조선군은 3천명이 채 되지 않는 규모였지만 곳곳에서 왜군을 피하기 위한 피난민들이 많이 들어와 있었으며, 이런 진주성을 10만명의 왜군이 공격해왔던 것입니다.
진주목사였던 김시민이 지키던 진주성을 3만 병력으로 공격했다가 처참한 패배를 당하고 다시 공격해온 왜군은, 쉴새없이 진주성을 포위공격했습니다. 거기에 일본이 자랑하던 쟁쟁한 장수들이 모두 모여 작은 진주성을 총공격했으니 성의 함락은 시간문제로 보였습니다.
이미 진주에 입성하기 전에 의병장 곽재우를 비롯한 조선의 많은 사람들은 진주성을 지켜내지 못할 것으로 보고 차라리 성을 비울 것을 주장한 바가 있습니다. 특히 곽재우는 황진을 만나 진주로 가지않고 병력을 보존할 것을 건의하지만, 이미 김천일을 비롯한 진주성을 지키는 사람들과 약속을 했다는 이유로 승산없어보이는 싸움에 끼어든 것입니다.
진주성은 황진을 필두로 한 군민들이 힘을 합쳐 8일 밤낮으로 지켜냈지만, 시체더미 안에 숨어있던 왜군의 저격병이 쏜 총알에 황진의 머리를 관통하면서 안타깝게 황진장군이 전사하고 맙니다.
안타까운 최후를 맞은 황진을 대신해 함께 무과에 급제했던 김해부사 이종인이 그를 대신하여 수성에 나섰지만, 결국 황진이 죽은 다음날 진주성은 성벽이 뚫리면서 함락당하고 말았습니다.
성을 지키던 수뇌부들은 끝까지 싸우다가 죽었으며, 이종인은 양쪽에 왜군을 끼고 자신의 이름을 외치면서 남강에 몸을 던졌다고 하니 정말 치열한 전투였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진주성이 함락되고 성안에 있던 3만에 가까운 백성들은 히데요시의 명령에 의해 학살당했으며, 그렇게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2차 진주성 전투는 조선의 처참한 패배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황진이 죽은 후 종 1품 우찬성에 제수되었으며 조정에서도 그의 행적을 기려 후손들에게 포상했다고 합니다.
다만 임진왜란이 한창 진행되던 시기에 전사했고, 지키던 성마저 함락되어 후대에 인지도를 전혀 남기지 못한 점은 아쉬운 점입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진주성이 함락된후 황진의 죽음을 애도한 바가 있고, 여러 사람들도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겼던 것을 보아 이제 막 그의 능력을 발휘하던 차에 전사한 것은 정말 안타까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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