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나라의 최전성기를 이끈 세종

2023. 2. 3. 12:19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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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중 세종이라는 시호를 받은 군주는 조선의 세종이 유일합니다.

조선의 세종은 재위기간 내내 괜찮은 정치를 폈으며, 문화와 과학기술 그리고 농업진흥 등의 다방면의 업적을 남겨 세종이라는 묘호를 받을 정도였습니다.

 

원래 세종이라는 묘호는 국가에 큰 업적을 남긴 군주들에게 부여되는 호칭입니다.

물론 명나라의 세종은 북로남왜라는 사건과 엄숭일당의 공포정치로 세종이라는 시호가 아까운 암군이었지만, 그 외의 세종이라는 묘호를 받은 군주들은 상당히 업적을 남긴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그중에서도 금나라의 세종은 전임 황제였던 희종과 해릉왕의 실정을 바로잡고, 금나라의 통치체제를 다시 정비했으며 어려웠던 금나라를 일으켜세운 군주로 평가받는 인물입니다.

 

금나라의 세종 완안오록은 1123년 여진족인 아버지와 발해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무래도 여진족이 요나라를 무찌를 때 곳곳에서 차별받던 발해유민들을 포섭하여 발해와 여진은 한 일가라는 구호를 내세울만큼 발해인들과 밀접한 관계였기 때문에, 세종의 어머니 또한 발해인인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긴 합니다.

 

다만 금나라의 4대 황제 해릉왕은 전임인 희종을 살해하고 군주가 된 인물인데, 정치는 발해인들을 중용하고 적극적인 한화정책을 펴면서 괜찮은 평가를 내릴 수 있지만 여색을 지나치게 밝히고 포악한 면이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또한 해릉왕은 자신의 친족여성들도 거리낌없이 범하였다고 하는데, 특히 완안오록의 아내인 오림답씨의 미모가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그녀를 억지로 궁에 끌고옵니다. 오림답씨는 남편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해릉왕의 부름에 응했지만, 결국 자신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결했으니 완안오록이 해릉왕에게 큰 원한을 가지게 되는 일이 되었습니다.

완안오록은 나중에 결국 옹립되어 황제가 되었지만, 끝까지 황후를 따로 세우지 않았고 죽는날까지 자신을 대신해 먼저 죽은 아내를 그리워했다고 전해집니다.

 

결국 남으로 쫓겨간 송나라를 정벌하겠다면서 해릉왕이 모든 군대를 이끌고 남으로 내려간 순간, 동북쪽에 있던 여진의 옛 수도에 있던 완안오록은 반란을 일으켜 해릉왕이 새로 건설한 중도 대흥부에 입성합니다.

이 사실을 들은 해릉왕은 반란을 진압할 생각을 하기는커녕 송나라를 공격해 남쪽에 눌러앉겠다는 생각으로 공격을 독려합니다. 하지만 남송군의 저항에 막히고, 강을 건너지도 못하자 결국 위기에 몰린 장군들이 해릉왕을 죽이고 수도에 있던 완안오록에게 항복하면서 완안오록이 새로운 금나라의 황제인 세종이 된 것입니다.

 

세종은 송나라와 먼저 화친을 했는데, 해릉왕 재위 후반에 남쪽에서 송나라가 보내는 막대한 평화를 구걸하는 돈을 받지 못하자 심각한 경제난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북방의 농지들은 북송시절까지 막대한 생산량을 보여줬지만 금나라와의 전쟁속에 사람들은 죽고 관개수로는 망가져 결국 남쪽 송나라가 보내는 돈에 의지해야만 했으니 바로 화친한 것은 현명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남쪽의 상황을 정리한 세종은 바로 국내정치를 바로잡았는데, 여기에서는 의외로 해릉왕의 덕을 많이 보게 됩니다.

해릉왕 시절에 공포정치로 인해 많은 귀족들이 숙청되었고, 그 빈자리를 발해인들로 채웠는데 세종 역시 발해인들을 내쫓지 않고 오히려 우대하면서 정치에 이용한 것입니다. 덕분에 고위관료로 발해인들이 많이 채용되었고, 금나라의 중추를 이루는 귀족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미 전임 해릉왕이 적극적으로 여진의 색깔을 벗어던지고 중국 한족의 제도를 많이 채용했으므로 세종 역시 이것을 따라가면서도 여진족의 독자적인 색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여진족의 성씨을 한자로 번역하는것을 금지하고, 여진어로 역사를 번역하는 등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만의 색채를 유지하기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세종의 이런 노력 덕분에 인구가 크게 늘어 2천만이 채 되지 않던 제국의 인구는 세종을 거친 다음황제 장종시기에는 5천만에 육박할 정도로 번영을 누리게 됩니다.

특히 해릉왕이 낭비한 재정을 다시 탄탄하게 정비하면서 하북과 산동 일대의 조세를 감면해주는 등 재정적으로도 아주 좋아진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정비된 국력을 화북지역의 재건에 사용하여 북송말기의 생산력을 다시 회복하였으며,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시기였으므로 사람들이 예전의 요순시대에 버금가는 소요순시대라는 칭찬을 할 정도로 금나라를 최전성기로 이끌었습니다.

 

다만 재정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세금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주로 화북에 거주하던 한족들에게 집중되었다고 합니다. 화북일대에서 토지를 가지고 큰 재산을 가지고 있던 한족들을 대상으로 새로운 세금을 거두면서 재정은 훨씬 나아졌지만, 그만큼 이들의 불만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거기에 원래 거란족을 많이 중용하던 금나라 초기와는 다르게 발해인들이 중용되면서 거란인들이 많이 고위관직에서 밀려났고, 그만큼 남아있던 거란족의 불만이 커지면서 결국 나중에 쳐들어오는 몽골인들과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으니 세종이 완벽하게 모든 일들을 잘 처리한 것은 아니긴 합니다.

또한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이 오랜 평화로 인해 전쟁의 기풍을 잃고 약체화되기 시작한것 또한 세종시기부터입니다.

남송에서 사신이 오면 송나라 사신과 금나라사람들이 활쏘기 내기를 했는데, 오히려 송나라 사신이 이기는 일이 이때부터 늘어났다고 하며 전쟁없이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여진족의 약체화는 세종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금 세종은 워낙 정치를 잘 한 편이고, 금나라의 국력을 최고조로 올려놓은 군주이기 때문에 몇가지의 아쉬움이 남을 뿐입니다. 특히 송나라에서도 가장 명군으로 평가받는 효종과 거의 동시대에 재위했기 때문에 두 나라 사이에는 별다른 충돌없이 평화를 유지했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세종의 후계자인 장종시절부터 시작된 금나라의 쇠퇴와 북방 몽골에서 칭기즈칸이라는 위대한 영웅이 나타나 금나라를 위협하게 되면서 금나라는 길지 않은 전성기를 마감하게 되지만, 희종과 해릉왕의 연이은 공포정치로 인한 혼란을 수습하고 국력을 크게 신장시킨 세종의 업적은 대단하다고 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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