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출신이지만 철저한 당나라인으로 살다간 고선지

2023. 1. 14. 12:06역사

반응형

원래 당나라는 선비족이 중심이 되어 관중지방에서 건국한 국가입니다.

이전에 성립된 북주와 수나라 자체가 한족이 아닌, 북방 이민족들이 뭉쳐 건국된 국가이기 때문에 일찍부터 여러 민족들을 받아들여 군인으로 활용해왔고 당나라의 태종이 고구려와 전쟁하면서 잡아온 전쟁포로들도 농서지방에 배치하여 국경방어를 맡길 정도였다고 합니다.

특히 이런 모습은 고구려와 백제가 무너지면서 더욱 많아졌는데, 고구려의 군인들 역시 당나라로 끌려와 주변 이민족을 제압하기 위한 전쟁에 투입되었고 거기에 백제 부흥군을 배신하고 동료들을 팔아넘긴 흑치상지 역시 백제출신으로는 드물게 큰 전공을 세워 연국공에 봉해지는 등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도 당나라에서 활약했습니다.

 

고구려가 망하기 전 군인으로 활약했던 고사계의 아들인 고선지는 북경 부근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집니다.

아마 고구려가 망하면서 끌려온 고구려 유민들에 고사계가 있었고, 이후 고선지가 태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이미 이름있는 무장이었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군인이 된 고선지는 747년 서북지역에서 토번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군대를 보내면서 이름을 날리게 됩니다.

 

전한시대와 후한시대 이후로는 서역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다가 당나라 현종 시대에 들어서 다시 서역의 비단길을 점령하기 위한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이것을 관장하는 기구가 안서도호부였습니다.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평양에 설치했다는 안동도호부나 백제땅에 설치한 웅진도독부처럼 당나라의 식민기관으로 설치된 안서도호부에서 고선지는 차근차근 전공을 쌓아나갔습니다.

당시의 안서절도사였던 부몽영찰은 이런 고선지의 능력을 시기하여 '창자를 씹어먹을 고구려 노예놈'이라는 막말을 퍼부었다고 전해집니다. 아마 계급도 낮고 경험도 없는 군인이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 엄청난 전공을 쌓았으니 열등감이 이렇게 터져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당시 전쟁터를 감시하기 위한 직책이었던 감군 변영성의 보고에 의해 오히려 고선지가 안서절도사로 올라가고, 부몽영찰이 하서절도사로 강등되는 일이 발생하고 맙니다.

당시 당군을 이끌던 고선지가 젊은 나이에도 엄청난 능력을 보여줬기 때문에, 당나라 조정으로서도 고선지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런 인사를 감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서역지방에서 승승장구하던 고선지는 여러 소국들을 다시 점령하고, 엄청난 재물과 포로들을 잡아 당나라 조정으로 보냈습니다.

이미 서역지방에 손을 뻗쳐오는 토번을 여러차례 격파하면서 이지역의 패권을 다시 쥔 고선지는 당시 인생 최고의 영광을 누렸으며 이곳을 통과하는 무역상들로부터 들어오는 중계무역 수익과 함께 현종시대 번영을 도운 공신이었습니다.

 

하지만 750년, 서쪽에서 이슬람 세계를 재통일하고 전임 우마이야 왕조를 완전히 정리한 아바스 왕조는 다시한번 중앙아시아 쪽의 패권을 잡기위해 전쟁을 일으킵니다.

이미 이전에 당나라에 항복할 의사를 밝힌 석국을 무력으로 점령해버리고 모든 재물을 약탈한후 석국의 왕족들을 장안으로 압송하여 처형한바 있는 고선지가 서역일대의 신망을 잃은 상태에서 아바스 왕조와 전투를 벌이게 된 것입니다.

지금의 키르기스스탄 일대에 위치한 탈라스에서 벌어진 전투는 당나라의 참패로 끝났습니다.

고선지가 이끄는 당군은 이미 먼 길을 행군하여 지쳐있었고, 주변 서역일대의 군사들을 모두 이끌고 대군을 이끌고 온 아바스군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수적 열세였으며 당나라의 편에서 싸우려던 카를륵군마저 배신하고 아바스의 편에 붙어버림으로써 당군의 완전한 참패로 끝난 것입니다.

 

그렇게 패배를 모르고 승승장구하던 고선지는 하루아침에 모든 직책을 잃고 물러났습니다.

다만 고선지가 발탁하여 참모로 삼았던 봉상청이 분전한 덕분에 당나라의 세력은 크게 물러나지 않고 유지되었으며, 이 지역에 대한 당나라의 패권이 오랫동안 유지되었다고 전해집니다.

 

패배 이후 하서절도사로 물러나 있던 고선지는 큰 시련을 만나게 됩니다.

755년 현종의 총애를 받으며 북방에서 절도사로 있던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당시 재상이었던 양국충과의 불화가 표면적인 반란의 이유였지만, 당나라에 오랫동안 평화가 유지된 탓에 쉽게 승리를 자신한 안록산의 자신감이 좀더 바란의 큰 이유였을 것입니다.

 

이미 하북지방의 수비군들이 도망가고 투항하는 과정에서 고선지가 뒤늦게 합류하여 봉상청과 합동작전을 펼치게 됩니다.

당나라의 동쪽 수도였던 낙양을 지키지 못하고 후퇴한 봉상청을 만나 방어에 유리한 동관으로 후퇴하는 과정에서 낙양 인근에 있는 창고를 열어 반란군이 약탈하기 전에 사람들에게 곡식과 돈을 나누어주었는데, 이것이 탄핵사유로 걸리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미 서역에서 자신을 구한 변영성이었지만, 그때는 변영성이 이것을 문제삼아 조정에 고선지와 봉상청을 탄핵했고 결국 조정으로부터 사신이 내려와 이들을 처형했습니다.

먼저 봉상청이 죽음을 맞았고, 이후 고선지가 억울함을 호소하면서도 차분하게 칼을 기다리며 죽었다는 기록을 보면 당시 당나라 조정의 무능함을 충분히 알수 있습니다.

 

그때의 상황을 기록한 내용을 살펴보면,

 

황제가 대노하여 변영성(邊令誠)에게 곧 군중(軍中)에서 베어 죽이게 했다. 변영성은 봉상청을 베어 죽여 시체를 거친 대자리에 싸서 버렸다. 고선지가 다른 곳에서 도착하자 변영성은 도수(刀手) 100명에게 자신을 따르도록 지시한 뒤 고선지에게 말하기를, "대부(大夫)에게도 역시 황명이 있다."고 했다.

.....고선지가 이내 급히 내려가 말하기를, "내가 후퇴한 것은 죄를 지은 것이니 그 때문에 죽는다면 어찌 할 말이 있겠는가? 그러나 나보고 창고의 식량을 도둑질했다는 것은 모함이다."라고 하고, 다시 변영성에게 이르기를, "위로 하늘이 있고, 아래로 땅이 있고, 삼군(三軍)이 모두 여기 있는데, 어찌 임금께서는 이 일을 모르시는가?" 했다.

또 휘하의 사졸들을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내가 너희를 모집했던 처음 의도는 적을 쳐부수고 나서 큰 상을 받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적의 기세가 이 순간에도 성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미루어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동관을 고수하고 있게 되었다. 내게 죄가 있다면 너희는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만약 너희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면 원통하다고 외쳐라!"라고 하자, 군중에서 모두가 "원통하다!"고 크게 외쳤는데 그 소리가 사방에 진동했다.

고선지가 봉상청의 시체를 보고, "그대는 내가 발탁했고, 또 나와 절도사를 교대했다. 지금 그대와 더불어 죽으니 이는 모두 운명이 아니랴!"하면서 죽음을 의연히 받아들였다.  신당서 고선지전

 

이들을 처형한 변영성은 그들의 군권을 맡아 반란군을 막게 되었는데, 오히려 안록산군에게 항복하여 끝까지 고선지와 봉상청이 지키려한 동관을 그들에게 넘겨주었으며 그로인해 안록산군이 수도인 장안까지 함락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고 말았습니다.

 

다만 고선지는 당시 죽음을 맞이할 당시까지 철저한 당나라인으로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부당한 황제의 명령을 받고도 피하거나 반란을 일으켜 반항할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자신의 부하였던 봉상청과 함께 얌전하게 죽어간 것입니다.

고선지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주변국인 대진국 발해나 신라로 도망가 군인으로서의 능력을 보여줬을 것이고, 안록산과 손을 잡아 당나라에 대항했다면 당나라에 더욱 큰 타격을 줄수 있었을텐데도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은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거기에 안록산의 뒤를 이어 반란을 일으킨 사사명의 난으로 발전한 반란은 8여년간 이어져 당나라의 경제적 기반을 완전히 박살냈고, 반란이 진압된 이후 이민족을 장군으로 등용하는 정책도 완전히 바뀌어 선비족과 한족출신 장군만을 등용하게 되니 이후 이민족출신으로 당의 높은 장군이 되는 일도 없어졌습니다.

 

고선지는 고구려 유민의 후손으로서 당나라의 장군이 되어 당을 위해 싸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눈부신 전공을 세우고도 역시 이민족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했고, 최후까지 당나라를 위해 싸우려했지만 결국 그 진의를 의심받아 죄를 뒤집어쓰고 죽어간 것입니다.

이런점은 앞서 언급한 흑치상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백제 부흥군을 배신하고 자신이 지키던 임존성을 직접 공격하여 함락시킨후 당나라의 장수가 되어 큰 전공을 세웠지만, 결국 감옥에 갇히고 자살하는 최후를 맞았으니 그들의 운명이 참 기구하다고 하겠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