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7. 13:13ㆍ역사
우리는 흔히 고구려가 건국된후 졸본성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한 후, 장수태왕 시기에 평양으로 천도한 사실만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668년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평양이 함락되면서 고구려가 멸망한 것으로 그렇게 배워왔습니다.
하지만 삼국사기를 잘 살펴보면 고구려는 국내성으로 천도한 이후 수도를 옮겼다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특히 국내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집안현도 일제 강점기에 일본학자인 도리이 류조가 별다른 근거 없이 그곳을 고구려의 국내성으로 비정해버렸고, 우리는 별다른 비판의식없이 국내성을 집안이라고 가르쳐온 것입니다.
동천태왕이 한창 요동지역에 있던 공손씨와 싸우고 있을무렵, 당시 중국은 삼국지의 배경이었던 삼국 분열시기였습니다.
원래 남쪽 오나라의 손권이 요동에서 할거중이던 공손연과 손을 잡기위해 사신을 보냈는데, 오히려 공손연이 사신을 죽이고 위나라로 압송하자 이들이 고구려로 달아났다고 합니다. 고구려는 이들을 잘 대접하여 돌려보내게 되는데, 이에 감동한 손권이 고구려에 직접 사신을 보내 교류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후 오나라와의 관계는 깨지고, 다시 위나라와 손을 잡은 고구려는 우선 요동의 공손연을 협공하여 멸망시킵니다.
눈앞의 공동의 적인 공손씨가 죽자 이제 국경을 맞닿게 된 고구려와 위나라는 전쟁을 시작하는데, 동천태왕은 그동안의 숙원이었던 서안평을 공격하여 점령해버립니다.
그러자 위나라 역시 고구려를 공격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우리에게도 유명한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관구검이라는 장수가 등장합니다.
서기 244년에 관구검이 위나라군을 이끌고 침입하자, 처음에는 고구려군의 선전에 힘입어 위나라군이 패했지만, 결국 계략에 휘말려 당시 고구려가 비류수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주력군을 잃은 고구려는 결국 수도인 환도성까지 빼앗기는데, 이 과정에서 고구려가 그동안 모아놓은 재물들을 전부 약탈당했고 궁실과 민가를 포함한 모든 건물이 불에 타고 말았다고 합니다.
동천태왕은 남옥저까지 도망치고, 이것을 추적하는 위나라군을 따돌리기 위해 밀우가 결사대를 조직하여 동천태왕의 도망가는 시간을 벌었지만 결국 따라잡히게 됩니다. 그러자 유유라는 장수가 나서 진귀한 음식을 가지고 적장을 만나 항복하는 척 하면서 방심을 유도한뒤, 그를 찔러죽이면서 위나라군의 혼란을 만들어낸 후에 결국 고구려가 군사를 수습하여 위나라군을 물리칠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도읍이었던 환도성이 잿더미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동천태왕은 종묘사직을 이끌고 평양으로 천도합니다.
왕은 환도성이 난리를 치러 다시 도읍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사직을 거기로 옮겼다. 평양은 본시 선인(仙人) 왕검의 택지였다. 혹 말하기를 왕의 도읍을 왕험이라 한다. 삼국사기
이 기록에 따르면 평양으로 천도할수밖에 없는 동천태왕의 절박한 상황이 보이며, 새로 천도한 곳이 조선의 왕검성 혹은 왕험이라는 곳이라는 내용을 적어놓았습니다.
이후 장수태왕의 평양천도는 이런 앞뒤 설명도 없이 그저 평양으로 천도하였다는 기록이 전부인데도, 굳이 우리는 장수태왕의 평양천도만 인정하고 있고 동천태왕이 실행한 평양천도에 대해서는 부정하고 있습니다.
식민사학의 대표주자인 이병도의 견해를 살펴보면 이때 평양 부근은 낙랑의 수도가 엄연히 존재했던 터이므로 거기로 이도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사실 불가능한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까닭이다. 국역 삼국사기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당시 평양지역은 낙랑군이었으므로 평양천도는 말도 안되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엄연히 기록으로 남은 사실이며, 당시 수도가 황폐화되어 평양으로 옮길수밖에 없었던 내용을 보면 오히려 삼국사기의 기록이 이병도의 주장보다 일리있어 보입니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평양은 반도 내가 아닌, 좀더 대륙에서 찾아야 한다고 봅니다.
만약 지금의 평양지역에 낙랑이 있었다고 해도, 고구려의 평양천도는 변하지 않는 사실이며 이곳이 바로 단군왕검이 수도로 삼은 곳이라고 하니 이 기록에 집중해봐야 합니다.
당시 낙랑군이 평양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가정한다고 해도, 당연히 고구려의 평양과 단군의 왕검성은 지금의 평양이 아닙니다. 또한 왕검성을 왕험성이라고 표기하고 있는데 이것은 산과 인접한 매우 험한 지역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대동강 유역에서 평야를 크게 끼고 있는 평양은 왕검성이 될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동천태왕이 옮긴 평양과 장수태왕이 옮긴 평양이 같은 지역인지도 확인이 필요합니다.
동천태왕이 옮긴 평양에 도읍하던 고구려는 16대 고국원태왕 시절에 다시 환도성으로 천도했고, 이후 모용황의 침입에 의해 환도성이 다시한번 불에 타버리자 이번에는 평양의 동쪽 황성으로 천도합니다.
이 동쪽의 황성에 대해서는 삼국사기가 기록된 고려시대의 서경 동쪽 목멱산에 있던 성이라고 적으면서 이점은 확실하지 않다고 남겨놓았으니 이 점에 대해서도 다시한번 검토가 필요해 보입니다.
이쯤되면 궁금해지는것은 평안도에 위치한 평양에 대한 내용입니다.
과연 평안도에 있는 평양의 원래 지명은 무엇이며, 지금 평양성이라고 남아있는 성은 과연 어느 시대에 만들어진 것인지도 궁금해집니다.
이곳의 진정한 역사를 밝힌다면, 대륙에 있었던 고구려의 평양의 진짜 위치를 다시 찾아야 하고 더 나아가 비틀린 우리 역사를 바로잡는 지렛대가 될 것입니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번 황제자리에 오른 명나라 영종 (0) | 2023.01.30 |
---|---|
고구려 출신이지만 철저한 당나라인으로 살다간 고선지 (0) | 2023.01.14 |
가장 화려한 번영과 몰락을 겪은 도시, 개봉의 역사 (1) | 2023.01.06 |
정말 영화같은 삶을 살다간, 기구한 운명의 군주 미천태왕 (0) | 2022.12.31 |
고려 초기 광종의 국토 개척과 우리의 편견 (0) | 2022.1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