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초기 광종의 국토 개척과 우리의 편견

2022. 12. 25. 16:15역사

반응형

https://youtu.be/Q0PYgcOuh5Q

제가 즐겨보는 황현필 선생의 유투브는 나름 유익한 점들이 많습니다.

얼마전 올라온 고려의 후삼국 통일영상에서는 고려가 결국 마지막 일리천 전투에서 승리하며 백제를 멸망시켰고, 그렇게 신라말부터 이어진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통일국가를 세우는 결과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만, 영상 후반부에 고려의 통일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부분은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듭니다.

특히 고려가 북진정책을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거란과의 전쟁을 시작한 성종때까지의 시간까지 한번도 북으로 진격하지 못했다는 내용을 언급하면서 고려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는데, 그점에 대해서는 그다지 공감이 가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국사교과서에서 신라가 대동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선까지만 올라갔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후 고려 초에 북진정책으로 청천강과 영흥만까지 영토를 넓혔다는 내용을 아무 생각없이 외워왔을 뿐입니다.

하지만 고려의 통일 이후에는 태조 왕건이 고구려의 옛 도읍인 평양을 중시하여 재건한후 서경이라는 이름을 붙여 중시했다는 짤막한 내용만 나올뿐, 북으로 진격하여 청천강까지 진격했다는 내용은 고려사에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평양에 자신의 친척인 왕식렴을 보내 평양을 재건하고 사람을 모여 살게 했다는 내용만 고려사에서 다루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일제강점기에 우리 역사를 조작한 일본인 역사학자들의 장난질이라고 봅니다.

신라의 강역을 대동강과 원산만 일대까지 축소조작하고, 그 뒤를 이은 고려의 영역 역시 그만한 수준으로 줄여야만 했으며  이후 고려가 확보한 강동8주를 지금의 평안도 일대로 비정하는 가운데 슬쩍 고려의 영토를 올려잡았을 뿐입니다.

 

거기에 고려초에 북진에 관련한 별다른 기록이 없다는 것과는 달리, 4대 황제 광종시기에 고려의 영토개척에 대한 기록이 보입니다.

6대 성종 시기에 거란이 고려를 침공하자, 외교로 이들을 물리칠 것을 주장한 서희가 조정에서 발언한 내용이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희가 또 아뢰며 이르기를, “거란의 동경(東京)으로부터 우리 안북부(安北府)까지 수백리 땅은 모두 생여진(生女眞: 숙여진의 잘못)이 살던 곳인데, 광종(光宗)께서 그것을 빼앗아 가주(嘉州)·송성(松城) 등의 성을 쌓았습니다. 지금 거란이 침입해 왔으니, 그 뜻은 이 두 성을 차지하려는 것에 불과한데, 그들(거란)이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겠다고 떠벌리는 것은 실제로는 우리(고려)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 고려사, 서희 열전

 

이 기록을 보면 이미 광종시기에 여진을 토벌하고 새로운 수백리에 달하는 영토를 개척했다는 것입니다.

고려 초에는 광종이후 거란의 동경이남은 전부 고려의 영토였고, 그렇게 새로 획득한 영토 덕분에 거란과의 분쟁이 시작되었다는 점을 알수 있는것입니다. 이미 당시 고려인들은 그런 인식을 가지고 있었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거란과 싸워 안융진에서 중랑장 대도수가 이끄는 고려군이 거란군을 격파하면서 전황을 바꾸었으니 이후 서희장군이 여진의 땅을 빼앗아 강동 8주를 새로 개척할수 있는 분위기를 만든 것입니다.

 

또한 광종대의 기록을 살펴보면 이와 관련된 내용이 보입니다.

 

습홀(濕忽)에 성을 쌓고 승격시켜 가주(嘉州)라고 하였으며, 송성(松城)에 성을 쌓고 승격시켜 척주(拓州)라고 하였다. 고려사절요 권2  광종 11년 3월

 

이 기사를 살펴보면 확실히 광종이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고 가주와 송성 등지의 성을 쌓은 것은 사실인듯 합니다. 새로운 영토를 개척하고 거란과 대치하는 상황이 되었는데, 이것은 우리가 그동안 알고있던 고려의 영토와는 많은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특히 서희가 인용한 거란의 동경을 살펴보면 고려의 영역을 알수 있습니다.

요나라의 역사와 지리를 기록한 요사지리지에서 요나라 동경을 기록한 내용이 있습니다.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는 본래 조선(朝鮮)의 땅이었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감옥에서 풀어주자 (기자는) 조선으로 갔고, (무왕은) 이로 인해 그를 봉해 주었다. (기자는) 팔조(八條)의 가르침을 만들어 베푸니, (백성들이) 예의를 숭상하고 농사와 누에치기로 부유해져 바깥 문을 닫지 않아도 사람들이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 왕위가 40여대까지 전해졌다. 연(燕)나라가 진번(眞番)과 조선(朝鮮)을 복속시키고 처음으로 관리를 두고 요새를 설치하였다. 진(秦)나라 때 요동의 바깥 요새에 속하였다. 한(漢)나라 초기에 연나라 사람 만(滿)이 옛 공지에서 왕이 되었다. 무제(武帝) 원봉(元封) 3년(기원전 108)에 조선을 평정하여 진번, 임둔(臨屯), 낙랑(樂浪), 현도(玄菟) 4군(郡)을 설치하였다. 후한(後漢) 때에 청주(靑州)와 유주(幽州)에 출입하였다.

요동군과 현도군은 연혁이 일정하지 않았다. 한나라 말기에 공손탁(公孫度)이 점거하여 아들 공손강(公孫康)을 거쳐 손자 공손연(公孫淵)은 스스로 연왕(燕王)을 자칭하고 소원(紹漢)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위(魏)나라가 멸망시켰다. 진(晉)나라가 고려(高麗 ; 고구려)를 함락시켰고, 나중에는 모용수(慕容垂)에게 귀속하였다. 아들 보(寶)는 고구려 왕 안(安 ; 광개토왕)을 평주목(平州牧)에 임명하여 거주케 하였다. 원위(元魏 ; 북위) 태무제(太武帝)가 그들이 거주하는 평양성(平壤城)에 사신을 보냈으니, 요(遼)나라 동경(東京)이 바로 이곳이다. 당(唐)나라 고종(高宗)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여기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였지만, 나중에 발해(渤海)의 대씨(大氏)가 차지하였다. 대씨는 처음 읍루(挹婁)의 동모산(東牟山)을 차지하고 있었다. 무후(武后 ; 측천무후) 만세통천(萬歲通天) 년간에 거란(契丹) 이진충(李盡忠) 에게 핍박받아 걸걸중상(乞乞仲象)이 요수(遼水)를 건너 스스로 지키니 무후가 진국공(震國公)에 봉하였다. 아들 대조영(大祚榮)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진왕(震王)이라 자칭하였다. 북쪽의 여러 나라를 병탄하니 영역이 사방 오천리나 되고, 병사가 수십만이나 되었다. 중종(中宗)이 도읍한 곳에 홀한주(忽汗州)라는 명칭을 내려주고 발해군왕(渤海郡王)에 책봉하였다. 12대 지나 대이진(大彝震) 때에 참람되게 연호를 고치고, 궁궐을 본따서 짓고, 5경(京) 15부(府) 62주(州)를 두었으니 요동에서 가장 번성한 나라가 되었다.

요사지리지에 기록된 요나라의 동경을 살펴보면, 이곳이 원래 조선의 영토였고 연과 조선이 다투던 곳이었으며 위만이 할거하던 곳이라는 것입니다. 한나라 무제 무렵 조선을 평정하고 4군을 설치하였고, 후한 무렵 청주와 유주에 출입했다는 기록을 보면 이곳은 지금 우리가 고구려의 수도로 알고있는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거기에 고구려가 평양성을 두고 도읍한 곳이 거란의 동경이며, 당나라 고종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이곳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는 사실까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후에는 발해의 대씨가 요수를 건너 평양을 차지했으니 이곳은 분명 요수와 멀지 않은 곳이고, 요동에서 가장 번성한 국가를 만들었다고 하니 거란의 동경은 분명 요수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고구려의 평양과 거의 동일하거나 근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우리가 알고있는 평양이 고구려의 수도였다면, 거란이 지금의 평양까지 내려와 동경요양부를 설치했다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이미 요양이라는 지명에서부터 이것은 평안도가 아닌 요녕성에 있던 지명임을 알수 있습니다.

이런 거란의 동경 이남부터 고려의 안북부까지 전부 광종무렵 고려의 영토로 만들었으니, 이곳을 탐내어 고려를 침략했을 거라는 서희 말을 보면 고려의 영역은 분명 지금의 압록강을 건너 요녕성 일대까지였음이 확실해집니다.

만약 고려가 일제 관변역사학자들의 주장대로 압록강을 건너지도 못하고 구석에 웅크려있었으면, 당시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는 거란이 굳이 고려를 치지도 않았을것이고 나중에 공격하더라도 그렇게 적극적으로 공격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 고려가 거란과 국경을 맞닿을만큼 영토를 확장했고, 덕분에 대륙의 송나라 역시 고려와 접촉하여 거란을 견제하려 하였으니 당시 소손녕이 이끄는 자칭 80만의 거란군이 고려에 침입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초반의 패배를 딛고 일어나 거란군을 격파하고, 결국 서희의 외교술로 오히려 새로운 강동8주를 개척하여 고려의 영토를 더욱 늘리는 한편 이곳을 요새화해 이후 벌어지는 전쟁에 대비했으니 고려초기의 북진정책은 비판받아서는 안되는 정책이라고 봅니다.

 

오히려 비판받아야 할 것은 일본인들이 축소하고 왜곡한 고려사를 그대로 추종하고 있는 우리일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미 고려에 대해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그런 정사인 고려사를 참고하기보다 일본인 역사학자들이 아무 근거없이 그어놓은 왜곡된 고려의 영토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떠받들고 있는 모습이 안타깝기 그지없을 뿐입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