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6. 13:01ㆍ역사
하남성에 위치한 개봉이라는 도시는 지금은 그렇게 크지만은 않은 도시로 남아있습니다.
이곳은 황하가 지나가는 곳이고, 도시 주변에 많은 운하들과 물길이 있기 때문에 홍수피해가 심했으며 그로 인해 고대의 개봉은 지하에 묻혀있는 채로 지금의 개봉시가 들어서 있을만큼 역사가 오래된 도시이기도 합니다.
우선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개봉은 춘추시대 정나라 때부터입니다.
정나라 장공이 변경을 개척하고 이 도시를 건설하면서 계봉(啓封) 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훗날 전국시대로 넘어오면서 위나라에게 점령되었습니다. 시간이 좀더 지난 후에 위나라가 제나라와 진나라에게 연패하면서 약해지자 위나라의 혜왕은 수도를 진나라와 인접하여 방어가 어려운 안읍에서 이곳으로 옮기며 대량이라는 이름으로 도시이름을 바꾸게 됩니다.
그렇게 첫 수도가 된 대량은 위나라가 망할때까지 수도의 지위를 유지했으며, 전국시대가 끝나고 항우와 유방이 다투어 한나라가 성립될때까지 개봉은 그저그런 도시로 남았습니다.
특히 위진남북조의 혼란이 이어질때까지 역사에 등장하지 않던 개봉은 수나라때 강남과 화북을 잇는 대운하가 개통되면서 운명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개봉 주변의 변하가 운하와 연결되면서 강남일대의 물산들이 화북으로 올라오는 길목이 되었으며 그로인해 도시가 번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수나라의 뒤를 이은 당나라 말엽에는 이미 경제의 중심지가 될 만큼 큰 도시로 성장했고, 당나라를 망하게 한 황소의 난 이후로 환관과 대신들을 죽이고 낙양으로 천도하여 결국 당나라를 찬탈한 주전충에 의해 개봉은 다시 수도가 됩니다.
중국인들이 중원이라고 부르면서 역사의 중심이었던 낙양과 장안 일대가 당나라 말부터 이어진 기근과 반란으로 인해 황폐화되자 결국 새롭게 경제의 중심으로 떠오른 개봉으로 도읍을 정한 것입니다.
이른바 5대 10국이라는 혼란속에서 화북지역을 장악한 주전충은 후량을 건국하여 당나라의 번진과 절도사들을 제거하였고, 결국 화북일대를 가지는 큰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주전충은 무장출신으로 수많은 혼외자식을 두었으며 수많은 사람을 죽인 폭군으로 유명한데, 결국 그의 아들이었던 주우규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주우규는 동생인 주우정의 공격을 받아 죽었으며, 황제가 된 주우정은 주변 가족들을 의심하여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버지 못지 않았다고 합니다.
북방의 이존욱이 후량을 침공하여 연전연패하는데도 주우정은 살육을 멈추지 않았고, 결국 923년 개봉성이 함락되면서 후량왕조는 멸망합니다. 그렇게 이후 세워진 후당은 도읍을 낙양으로 옮겼지만, 그 뒤를 이은 후진은 다시 개봉으로 천도하면서 다시한번 국가의 중심이 됩니다.
그렇지만 성립부터 거란의 지원을 받아 세워진 후진왕조는 지속적인 거란의 세폐요구에 시달립니다.
후진의 새로운 황제가 된 석중귀는 거란에 반항하는 정책을 폈고, 결국 거란의 태종의 침입을 받아 개봉성이 또다시 함락되면서 후진왕조는 10년의 짧은 집권기간을 끝으로 망하고 말았습니다.
거란이 주변을 너무 가혹하게 약탈하자 결국 여기저기에서 반항이 일어났고, 그것을 틈타 후한왕조가 다시 개봉을 수도로 세워졌지만 4년만에 멸망하고 후주왕조가 들어섭니다.
후주의 창업자 곽위가 죽은후 황제가 된 세종 시영은 명군으로 칭송받는 인물인데, 이 사람이 개봉을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은 인물이기도 합니다.
개봉은 화북평원 한가운데 위치하여 경제의 중심이긴 하지만, 방어가 취약하다는 단점이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앞서 북방의 거란이 침입했을때도 이를 막을수 없는 방어선이 없었기 때문에 후주의 세종은 큰 결단을 내립니다.
개봉의 성벽을 크고 웅장하게 다시 쌓았는데, 주변토지가 약하니 낙양부근 호뢰관 일대의 흙을 공수해와 특별히 더욱 견고한 성을 쌓았다고 합니다.
거기에 외성과 내성, 황성으로 구성된 3중 구조로 된 단단한 성벽을 쌓아 만약 도성이 포위되더라도 버틸수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로 다시 탄생시킨 것입니다. 거기에 만약 포위되더라도 성을 지키기 위한 여러가지 장치들이 설치되어 정말 쉽게 넘볼수 없는 곳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도성 주변의 크고 넓은 해자와 함께 설치되었다는 방어를 위한 장치들을 보면 당시 개봉성 축조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알수 있습니다.
후주의 뒤를 이어 성립된 조광윤의 송나라는 도성을 그대로 개봉으로 유지합니다.
다만 조광윤은 개봉을 수비하는데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는 이유로 낙양으로 천도를 고려했다는데, 당시 많은 대신들과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개봉에서 천도하는데 실패하고 그대로 개봉을 수도로 유지합니다.
송나라의 개봉은 이렇게 수도가 되어 번영하게 되는데, 당시 송나라의 상업이 고도로 발달하여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도시의 모습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특히 당나라때까지는 도성인 장안에 시장이 들어서도 해가 지면 문을 닫고 장사를 할수 없는 엄격한 통제를 받았는데, 송나라때부터는 하루종일 장사하는 상인들이 늘어나면서 정말 불야성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이런 송나라 개봉의 모습을 그린 청명상하도를 살펴보면 당시 개봉의 번영이 어떤 상태였는지 충분히 알수 있습니다.
https://www.yna.co.kr/view/AKR20150910180900083
中 '천하제일명화' 청명상하도 전체 이례적 전시 | 연합뉴스
(베이징=연합뉴스) 이준삼 특파원 = 중국 베이징(北京)의 고궁박물관이 개관 90주년을 맞아 북송 때의 대표적인 풍속화인 '청명상하도'(淸明上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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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공개한 청명상하도를 보면 우리가 상상하는것 이상으로 당시 송나라가 얼마나 발달된 곳이었는지 짐작이 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부유한 삶을 누리고 있었고, 운하를 타고 올라오는 남쪽의 물산들이 모이는 곳이었으니 화려하고 사치스러웠던 송나라 귀족들의 모습도 함께 유추해볼수 있습니다.
다만 이런 번영은 송나라가 멸망하면서 끝나게 됩니다.
1127년 금나라의 침입을 받아 도성인 개봉이 포위되었고, 처음에는 근왕병의 지원을 받아 금나라군을 물리쳤지만 결국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송나라의 개봉이 무너진 것입니다.
하지만 이때도 금나라군이 완전히 돌파한 것은 아니고, 일부 성벽이 점령되자 당시 황제였던 흠종이 더이상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했다고 하니 정말 끝까지 서로 목숨을 걸고 싸웠으면 어떤 결과를 낳았을지는 의문입니다.
그렇게 개봉이 함락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북방으로 끌려갔으며, 번영을 자랑하던 개봉은 결국 금나라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금과 송의 화의가 성립되면서 북방지역을 할양하는 과정에서 도성이었던 개봉까지 전부 넘겨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렇게 개봉은 더이상 힘을 잃고 쇠퇴했으며 경제력의 중심이었던 변하마저 물길이 달라지고 끊기며 완전히 경제의 중심에서 밀려났습니다.
이후 금나라가 몽골의 침입을 받으면서 금나라의 선종은 북방의 북경지역에서 개봉으로 도망치듯 천도했는데, 그렇게 오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개봉성 안으로 몰리게 됩니다.
몽골군이 개봉을 포위하고 공격하자 성안에 모여있던 사람들 가운데 역병이 돌았고, 결국 몽골군은 물리쳤지만 병으로 100만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다고 하니 당시 얼마나 비참한 상황이었는지 알수 있습니다.
당시 황제였던 애종은 개봉을 버리고 도망쳤으며, 이후 몽골에 항복하여 다시 함락된 개봉은 수많은 시신이 가득한 죽음의 도시였다고 하니 이전 송나라의 번영은 전혀 찾아볼수 없는 상태였다고 합니다.
이후 원나라 말엽에 반란을 일으킨 홍건적이 개봉을 점령하고 송나라의 부흥을 천명하면서 다시한번 개봉은 비상하지만, 북방에서 내려온 차칸테무르의 손에 다시 개봉이 함락되고 홍건군의 수장은 주원장의 손에 죽는등 다시 찾아온 개봉의 영광은 길지못했습니다.
명나라 말기에는 농민반란을 일으킨 이자성이 개봉성을 공격하였는데, 병부시랑이었던 손전정이 원군을 거느리고 선전하였기 때문에 쉽게 함락시킬수 없었다고 합니다. 결국 황하의 제방을 무너뜨려 성을 물에 잠기게 하는 수공을 써서야 간신히 이자성이 점령했는데, 이미 황폐화된 개봉성을 손에 넣어도 남아있는게 없었다고 하며 당시 물에 잠긴 개봉성에서는 명나라 수비군이 나무에 열린 제대로 익지도 않은 감을 먹어가면서 결사적으로 싸웠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이후 개봉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주변의 정주가 하남성의 성도가 되고, 전체적으로 낙후된 하남성의 경제상황 속에서 더이상 개봉이 부각되지 못하고 있는것으로 보입니다.
확실히 고대부터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있어 여러 왕조들이 수도로 삼은 도시답게 개봉은 오늘날에도 상당히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라고 합니다.
다만 하남성의 경제의 중심은 인근 정주에 몰려있고, 개봉을 지탱하던 대운하 역시 쇠퇴하여 관광지로만 남아있는 상황이니 중국의 고도로 알려진 장안이나 낙양과 비슷하게 쇠락해버린 운명을 겪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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