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2. 31. 13:39ㆍ역사
고구려의 14대 태왕으로 등극한 봉상태왕은 즉위 초반부터 폭군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서쪽에서 쳐들어오는 선비를 막기위해 고노자를 등용하여 신성태수로 삼아 방어했으며, 창조리를 국상으로 삼아 괜찮은 정치를 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이전의 미약했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함인지 주변 왕족들을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이전의 군주였던 중천태왕과 서천태왕이 모두 태왕자리를 노린 왕족들의 반란으로 고생한 경험이 있어서인지 즉위하자마자 전쟁영웅으로 떠올랐던 숙부 달가와 자신의 동생인 돌고를 숙청하는 것을 시작으로 많은 왕족들이 죽어나갔다고 하니, 당시 고구려의 지배층중 상당수가 봉상태왕의 숙청을 피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돌고의 아들이었던 을불은 죽음을 피해 필사적으로 도망쳐 촌구석에 몸을 숨기게 됩니다.
정체를 숨기고 음모라는 부자의 머슴이 되었는데, 음모의 괴롭힘도 심했다고 하며 특히 여름에 개구리가 연못에서 울지 못하게 돌을 밤새 던져 쫓아내는 일까지 해야 했다고 하니 고구려의 당당한 왕족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맡은 머슴으로 지위가 떨어져버린 것입니다.
결국 음모의 이런 괴롭힘을 참다못한 을불은 소금장수인 재모와 만나 동업을 하게 됩니다.
다만 소금장수를 하게 된 후로도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고, 이전보다 약간 나아진 것에 만족해야 했다고 전해집니다.
소금을 팔다가 압록강 동쪽의 사수촌에서 한 노파의 집에 묵었는데, 이미 소금을 숙박비로 받아간 후에도 만족하지 못한 노파가 을불의 소금안에 자신의 신발을 집어넣은 후 도둑으로 신고해버렸습니다.
결국 소금을 몽땅 빼앗기고 흠씬 두들겨 맞은 몸으로 소금장수도 할수 없었으며, 병이 들어 완전히 거지꼴이 되었다고 하니 이전의 왕족의 모습을 전혀 찾을수 없었다고 합니다.
당시 즉위한지 7년째를 맞은 봉상태왕은 주변의 왕족들과 신하들을 숙청하고, 흉년이 들었는데도 백성을 구제하지 않고 오히려 이들을 징발하여 궁궐을 수리하는데 힘을 쏟았습니다. 당시 국상이었던 창조리가 이에대해 간언하자 죽고싶지 않으면 저리가라는 태왕의 말을 듣고 결국 새로운 태왕을 세워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마음을 굳힌 창조리가 사람을 시켜 결국 을불을 찾아냈는데, 그때까지도 봉상태왕이 그를 죽이기 위해 보낸 자객인줄 알고 경계하면서 남긴 말이 삼국사기에 전해집니다.
予野人, 非王孫也。請更審之。
나는 야인이지 왕의 후손이 아닙니다. 부디 다시 살펴보십시오.
이것이 유일하게 전해지는 미천태왕의 말인데, 당시는 정말 누가봐도 꾀죄죄한 거지꼴이었다고 하니 아마 그를 찾으러 온 사람들도 이사람이 왕족인지 의심이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창조리의 진심을 알게된 을불은 결국 봉상태왕을 폐위시키고 새로운 고구려의 태왕으로 등극합니다.
다만 미천태왕이 즉위한 직후에는 삼국사기에 자연재해와 여러 이상현상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봉상태왕을 죽이고 태왕이 되었지만 아직은 민심이 그를 따르지 않았을 것이고, 자신이 즉위하는데 큰 공을 세운 창조리의 기록이 더이상 전해지지 않는것을 보면 그와 미천태왕이 권력다툼을 벌여 결국 태왕이 승리하는 쪽으로 결말지어졌을 가능성도 있어보입니다.
그렇게 국내정치를 안정시킨 미천태왕은 드디어 서쪽 진나라를 공격합니다.
사마염이 세운 진나라는 팔왕의 난을 거치면서 국가가 완전히 박살났고, 이후 북방민족의 침입을 연이어 받으며 수도인 낙양을 위협받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공격에 완전히 속수무책으로 당할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나마 남아있던 진나라의 정예군이 유총과 석륵에게 전멸당하고 낙양 방어에 전념하다보니 아무래도 이전같은 고구려의 대대적인 공격에 완전히 무릎을 꿇을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국사교과서에서도 강조하듯, 미천태왕은 311년 그렇게 치열하게 다투던 서안평을 점령하는데 성공합니다.
태조태왕때부터 한나라와 뺏고 빼앗기는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펼치던 서안평을 점령하여 결국 요서지역으로 가는 길을 열었고, 이후 낙랑과 대방을 점령하는데 큰 교두보가 된 것입니다.
이토록 우리역사에서 큰 지분을 차지하는 서안평인데, 이곳을 지금 중국학계에서는 압록강 너머의 단동이라고 비정합니다. 하지만 서안평에 대해서 중국기록은 전혀 다른 말을 남기고 있습니다.
한나라 시기에 설치된 서안평은 한을 멸망시킨 왕망에 의해 북안평으로 개칭되니, 분명 서안평 동쪽에는 안평이라는 지명이 있었을 것입니다. 안평이라는 지명이 있어야 훗날 북안평으로 바뀐것이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금의 단동이 서안평이라면 압록강 동쪽에는 분명 안평이라는 지명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으로서는 전혀 이런 지명은 보이지 않습니다.
거기에 요사지리지에서는 상경 임황부는 본래 한漢나라의 요동군 서안평 땅이다. 上京臨潢府 本漢遼東郡西安平之地. 라는 내용을 밝히고 있으니 지금의 단동에 서안평을 비정하는것은 더욱 근거가 없어보이는 일입니다.
요나라의 상경임황부는 나중에 금나라에 점령되어 새로 개편된 내몽골쪽에 있는 곳이었으니, 미천태왕이 점령한 서안평 또한 그 근처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서안평을 완전히 점령한 미천태왕은 313년 낙랑군, 314년 대방군을 점령하여 한나라가 조선을 점령하고 설치한 행정구역을 완전히 고구려의 소유로 삼았습니다. 역시 그동안 치열하게 싸우던 진나라군을 물리치고 조선의 옛 땅을 되찾았으니, 결국 요동에서의 주도권을 잡을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이후의 싸움에서는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했습니다.
당시 요동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자랑하던 모용선비를 점령하기 위해 진나라 평주자사 최비와 우문선비, 고구려가 연합군을 결성해 쳐들어갔지만 이간책에 말려들어 진나라와 고구려는 후퇴하고 결국 우문선비가 크게 패하는 결말을 맞게 됩니다. 훗날 더욱 강력해진 모용선비와 고구려는 서로 밀고밀리는 양상을 보였으니 이때 모용선비를 완전히 끝장내지 못한 것이 아쉬워질 뿐입니다.
그렇게 국내정치를 안정시키고 대외적으로도 여러 공적을 남긴 미천태왕은 30여년간 재위하고 사망합니다.
그의 사후 미천언덕에 묻혔기 때문에 미천태왕이라는 시호가 붙었으며 그의 아들인 고국원태왕이 승계하여 고구려를 이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미천태왕은 죽어서도 고생을 하게 됩니다.
훗날 쳐들어온 모용황의 선비군을 막지못하고 고구려군이 패하여 수도인 환도성이 함락되어 약탈당했고, 그 과정에서 미천태왕의 시신도 도굴되어 연나라로 운반되었으며 태후까지 볼모로 잡혀가는 최악의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런점을 보면 미천태왕의 재위기에 모용씨를 완전히 전멸시키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입니다. 그때 이간책에 넘어가지 않고 연합군이 공격을 무사히 감행했다면 훗날 고구려의 굴욕은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미천태왕의 시신은 모용씨의 연나라에 고개숙인 고구려에 금방 돌아오게 되지만, 태후는 13년 후에 본국으로 돌아올수 있었으니 결국 이런 모욕은 훗날 손자인 광개토태왕이 후연을 멸망시키면서 갚게 됩니다.
미천태왕은 왕족으로 태어났지만 폭군에 의해 죽을 뻔한 위기를 넘겼고, 이후 각지를 고생하면서 최하층의 생활을 전전하다가 창조리의 손에 의해 태왕의 자리에 올라 고구려를 크게 번영시켰습니다. 30여년간의 재위기간동안 백성들의 힘든 생활을 배려하는 정치를 했다고 하니, 당시 미천태왕의 집권기간동안 고구려의 국력이 크게 뻗어나간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다만 아들이 고구려 최악의 암군인 고국원태왕이었기 때문에 죽어서도 연나라에 끌려가는 굴욕을 당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후 이어진 그의 후손들이 소수림태왕, 고국양태왕, 그리고 고구려의 위대한 정복군주 광개토태왕으로 이어지니 후손들을 잘 둔 미천태왕의 복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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