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2. 15. 13:24ㆍ역사
12세기 동아시아 최강국이었던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대륙의 송나라를 침공하여 영토의 절반을 빼앗은 금나라는 순식간에 동아시아 최강국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여기며 군신관계를 맺은 여진족이었지만, 이제 세력이 완전히 반대로 돌아가자 오히려 고려에 군신관계를 요구해 관철시키는 등 전성기를 누립니다.
송나라를 멸망시키고 남으로 밀어낸후 매년 25만냥의 은과 25만필의 비단을 받아내고 송나라 황제와 군신관계를 맺은 화의를 맺은 쾌거를 이룬 뒤 금나라의 황제였던 희종은 갈수록 정치에 뜻을 잃어버립니다.
점령한 하북과 하남, 산동과 섬서일대에서 금나라의 세력을 강화하고 중앙집권화를 실시하였던 통치 전반기와는 달리 집권 후반기에는 갈수록 술에 빠져 신하들과 공신들을 함부로 죽이는 공포정치를 하게 되었으니 불만이 쌓이는 것은 당연해보였습니다.
이런 와중에 신하들은 의논을 거쳐 희종을 죽이고 새로운 황제를 세웠는데, 이때 새로 등극한 사람이 해릉왕입니다.
백성을 크게 괴롭혔다는 의미의 양煬이라는 시호를 받아 해릉양왕이라고도 하는 이 사람은 집권 초기에는 의욕적인 모습을 보였고, 금나라의 집권층인 여진족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었습니다.
특히 기득권이었던 여진의 귀족들을 숙청하고, 새로운 자신의 지지층을 만들기 위해 거란인과 발해인을 적극 등용하는 한편 수도역시 기존의 상경 회령부에서 중원에 좀더 가까운 지금의 북경지역으로 옮겨 중도 대흥부를 새로 건설했습니다.
하지만 천도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고, 궁전을 황금으로 치장해 바람이 불면 금가루가 날릴 정도였다고 합니다. 거기에 이전 황제들의 묘소 역시 만주지역에서 북경 인근으로 옮겨 크고 성대하게 조성하는 등 무리한 토목공사를 벌여 백성들을 힘들게 했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해릉왕은 역사서에 아주 변태적인 성향을 가진 인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상한 취향을 가진 해릉왕은 유부녀를 주로 취하는 습관이 있었고, 그로 인해 많은 신하들과 측근들은 아내를 황제에게 빼앗기고 죽음을 맞는 일들이 많았다고 전해집니다.
자신의 숙모와 처제, 조카를 건드리는 일도 비일비재했고 그것 덕분에 수많은 사람들이 해릉왕에게 죽어나갔으며, 수도 인근에 있는 유부녀들을 물색하고 다녔다고 하니 좋은 평가를 얻지는 못한 모양입니다.
다만 이것은 황제의 사생활이고, 이후 해릉왕을 죽이고 즉위한 세종시기에 기록된 점이라는 것을 살펴보면 해릉왕에 대한 오해일수도 있습니다. 황제자리를 찬탈한 세종의 입장에서는 해릉왕의 잘못을 하나라도 더 만들어 찬탈의 정당성을 만드는것이 유리하므로 이런 엽기적인 성적취향은 너무 크게 받아들이지 않는게 좋아보입니다.
하지만 해릉왕을 몰락시킨 결정적인 사건은 송나라 정벌시도였습니다.
금나라가 점령한 중국 북부는 이미 개발된지 오래되어 농업경제력이 떨어진 지역이고, 송나라와의 오랜 전쟁 덕분에 인구는 줄어들고 생산력은 격감하여 경제가 파탄직전이었기 때문에 송나라로부터 받는 세폐가 아주 중요한 금나라의 수입원이었습니다. 하지만 해릉왕은 송나라를 정벌하고 동쪽의 고려와 서쪽의 서하까지 병합하겠다는 목표를 세웠고, 가장 첫번째로 남쪽의 송나라를 공격한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50여만의 백성들을 동원하여 송나라 정벌에 필요한 배를 만들었으며, 송나라를 공격하는 동안 세폐도 받지 못한채로 경제는 파탄난 채였으니 누가봐도 막장인 상황이었습니다.
송나라를 공격하여 첫 싸움에서는 송의 양회방어선을 뚫고 선전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송나라의 장수가 겁을 먹고 도망쳐 얻은 어부지리였으며, 이후의 싸움부터는 계속하여 고전하게 됩니다.
특히 송나라의 명장인 우윤문이 이끄는 수비군과 싸운 채석기 전투에서 완패하여 사기가 완전히 꺾인 금나라군이었지만, 해릉왕은 무리하게 장강을 넘어 공격할 것을 요구합니다.
결국 고착화된 전선에서 3일안에 강을 넘지 못하면 장수들을 전부 죽이겠다는 위협을 받은 후, 금나라군 내부에서는 해릉왕을 죽이자는 의견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이미 북방에서는 해릉왕에 반대하는 완안옹의 반란이 일어나 수도인 중도를 점령한 상태였고, 금나라 곳곳에서는 해릉왕에 반항하는 세력들이 생겨나고 있었는데도 송나라 공격에 집중하고 있던 황제를 더이상 두고볼수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렇게 황제를 곁에서 지켜야 할 금군이 들고일어나 해릉왕을 사로잡고 북방으로 철수하게 되니 송나라로서는 큰 위협을 넘기게 되었고, 수도에서 새로운 황제가 된 완안옹은 해릉왕을 잡아와 처형하게 되니 그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입니다.
해릉왕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사람이 바로 금나라의 최대 전성기를 이끈 세종입니다. 세종은 해릉왕을 황제에서 왕으로 강등시켰으며, 이후 폐서인시킨 후에 제대로 된 무덤도 만들어주지 않고 모래벌판에 시신을 내다버렸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릉왕의 집권시기는 끝났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잘못만 한것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해릉왕은 기존의 여진 귀족들을 숙청하고 자신의 친위세력을 만들기 위해 거란족과 발해인을 많이 등용하였습니다.
해릉왕의 어머니가 발해황족인 대씨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즉위 이전부터 충분히 발해인들과 사전교감이 있었을거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금나라 건국과정에서 공적을 많이 세웠지만 권력에서는 밀려나있던 발해인들이 해릉왕과 만나 충분히 그의 권력을 뒷받침했다는 내용이 기록으로 전해지는만큼 발해인들이 그의 치세에서 좋은 대우를 받았을 것입니다.
이후 등용된 발해인들은 금나라 조정에서 고위관직을 맡으며 해릉왕이 죽은 이후에도 세종에게 충성하면서 귀족의 지위를 이어갑니다.
또한 발해인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여 이룩한 중앙집권화는 이후 금의 전성기를 이끈 세종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여진족은 너무 짧은 시간안에 부족국가에서 제국으로 발전하면서 많은 폐단을 낳았는데, 이것을 새로 등용한 발해인들과 중국인들로 인해 보완할수 있었습니다.
거기에 기존의 여진귀족들을 숙청하고 일구어놓은 여러 개혁적인 시도 덕분에 세종은 해릉왕과 크게 다르지 않은 정책을 밀고나갈수 있었고, 덕분에 금나라 최전성기를 이룩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니 해릉왕이 무조건 잘못만 한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바꿔말하면 무리한 토목공사와 송나라 정벌만 아니었으면 해릉왕은 나름 괜찮은 황제로 역사에 남을수 있었다고도 보입니다. 여러 개혁들이 효과를 보일무렵 생겨난 자신감으로 일으킨 무리한 공사와 전쟁으로 몰락한 해릉왕이니, 그 점 덕분에 후세에 여러 교훈을 남긴채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한 그가 안타까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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