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1. 25. 14:33ㆍ역사
부여에서 건너온 주몽이 기원전 37년 고구려를 건국했을때,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자신의 성씨를 고씨로 바꾸었다고 나옵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는 추모태왕이 고구려를 건국한 후 고씨를 자신의 성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전하고, 자신이 나라를 세울수 있게 도와준 소서노와 결혼하여 비류와 온조 형제를 아들로 두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부여에서 이미 예씨와 결혼하여 장성한 아들인 유리가 고구려로 건너왔고, 결국 건국에 큰 공을 세운 소서노의 아들을 대신해 유리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합니다.
그런데 고구려 2대 태왕이 되는 유리태왕은 해씨라는 기록이 보입니다. 삼국유사 왕력 유리왕편에는 그의 성씨가 해씨라는 것을 기록하고 있으니, 확실히 유리태왕은 해씨라는 성씨를 가진 사람이었던듯 합니다.
다만 주몽의 성씨가 고씨이고, 다음 군주인 유리태왕이 해씨라는 점을 들어 둘의 혈통이 다르다는 주장도 있긴 하지만 굳이 자신이 소서노를 통해 낳은 아들을 제치고 유리에게 군주의 자리를 넘긴 것과 이후 추모태왕의 결정에 신하들이 복종했다는 기록을 살펴보면 주몽과 유리가 부자지간인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해씨는 부여의 군주가 사용하던 성씨입니다.
단군조선이 문을 닫은 이후, 북부여를 건국한 해모수가 태양을 상징하는 의미로서 해씨라는 성씨를 사용했으며 이후 부여의 대표적인 왕족들이 사용하는 성씨가 된 것입니다.
부여에서 태어나 어느정도 자리를 잡고있던 주몽 역시 당연히 해씨라는 성을 사용했을 것이고, 그래서 이후 태어난 아들인 유리 역시 자연스럽게 해씨라는 성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유리태왕의 뒤를 이은 3대 대무신왕 역시 해씨라는 기록이 있고, 특히 4대 민중태왕은 해색주라는 온전한 성과 이름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5대 모본태왕은 해우 혹은 해애루라는 이름이 전해지는 것을 보면 확실히 고구려 초기의 군주들은 해씨라는 성씨를 사용했고, 이것이 그대로 전해내려온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다만 그 뒤를 이어 즉위한 6대 태조태왕부터는 뭔가 달라지는 모습을 보입니다.
고구려의 모본태왕은 짧은 재위기간에 비해 미심쩍은 부분이 많은 군주인데, 기병을 동원하여 한나라를 침략하고 약탈했다는 기록이 보입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모본태왕 2년에 장수를 보내 한나라의 북평, 어양, 상곡, 태원 등지를 공격하고 약탈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후 요동태수인 제융이 화친을 청해와 엄청난 물자들과 돈을 받고 물러났다고 하는 내용은 후한서 광무제본기에 적혀있는 요동의 맥인들이 우북평, 상곡, 어양, 태원을 습격했다는 내용과 일치하기 때문에 신빙성이 높은 기록으로 보입니다.
이렇듯 모본태왕은 고구려의 강력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한나라와 대등하게 싸울 정도였고, 당시 중원을 다시 통일한 광무제를 두려워하지 않고 군사를 보낼 정도로 큰 위세를 떨친 군주였는데 갑자기 폭군으로 묘사되면서 두로라는 인물에게 암살당하는 결말을 맞고 말았습니다.
전형적인 폭군으로서 사람을 함부록 죽이고 괴롭혔다는 기록과는 반대로 삼국사기에는 모본태왕이 즉위 초반에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휼하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이후 모본태왕을 시해한 두로라는 인물이 상을 받거나 처벌받은 기록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을 보면 군주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의심스러울수밖에 없습니다.
이후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6대 태조태왕은 유리태왕의 아들이었던 고재사의 아들이라고 전해지는데, 시호부터 뭔가 새로운 느낌이 물씬 풍기는 태조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주로 국가의 건국자를 가리켜 고조라는 명칭을 사용했고, 그래서 한을 건국한 유방이 한 고조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당나라를 건국한 이연 역시 당 고조라는 시호를 사용하게 됩니다.
그 후 송나라를 건국한 조광윤에 이르러 송 태조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태조라는 명칭은 고구려에서 훨씬 이전부터 사용되었고 국가를 건설한 인물들에게 붙이는 명칭이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이런 명칭에서 보듯, 이전과는 조금 다른 고구려의 중시조로 태조태왕을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보면 확실히 초기와는 달라진 고구려를 짐작할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렇게 태조태왕이 고구려의 군주가 된 이후, 그때부터 고구려의 군주들의 성씨는 고씨로 전부 교체됩니다.
1대 추모태왕부터 5대 모본태왕까지는 해씨라는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군주가 되었지만, 6대 태조태왕부터는 고씨들이 군주의 자리에 올랐으니 많은 사람들이 이때부터 고구려 왕실의 계보가 달라진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추모왕의 방계혈통이었던 고씨들이 왕위를 찬탈한 후, 이전 해씨들의 역사를 지우기 위해 추모왕의 성씨를 고씨로 바꾸는 역사왜곡을 했을거라는 추측도 나오고 있으니 이런 고구려 왕실계보의 변화는 더욱 흥미진진한 고구려의 역사로 남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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