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1. 3. 15:48ㆍ역사
우리 역사에서는 말갈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민족이 있습니다.
백제 건국초기와 신라 건국초기부터 말갈은 백제의 성을 함락시키고 약탈해갔으며, 신라에도 침입해 역시 신라의 성을 빼앗고 변경을 어지렵혔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이후 말갈은 고구려에 편입된 것으로 보입니다. 영양태왕이 수나라 문제의 침공 이전에 고구려군과 말갈의 기병을 이끌고 임유관을 비롯한 수나라의 변경을 초토화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고구려에 침입한 당나라의 태종은 안시성 인근에서 벌어진 싸움에서 이기고 말갈병사들은 전부 생매장했지만 고구려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살려줬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아마 고구려가 전성시기를 맞은 때부터 말갈족은 거의 고구려에 흡수 혹은 동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에는 말갈족이 추장인 걸사비우가 대조영 부자에 협력해 대진국을 건국했다는 기록이 있고, 그렇게 말갈은 대진국 혹은 발해라는 이름의 국가를 세워 발해인으로 살아간 것으로 보입니다.
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한 고려가 한때 국경을 맞닿은채 이웃국가이자 같은 민족으로 인식하고 있던 대진국 발해는 926년 거란의 침략을 받아 국가가 무너집니다. 싸움에 패한 발해의 지배층이 거란의 수도로 끌려가고 도읍이었던 상경성은 거란군이 불을 질러 성벽을 비롯한 건물들이 녹아내릴만큼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고 전해지는 와중에 남은 발해의 귀족들은 고려로 망명하거나 각지로 흩어졌으며, 그 땅에 남은 사람들은 거란에 의해 집단이주 당하거나 우리가 흔히 부르는 여진인으로 살아갔습니다.
이후 발해의 옛 땅은 고려와 거란이 양분하는 상태였지만, 상당량의 빈 땅에서는 여진족이 반농반목의 생활을 유지하면서 살아갔다고 전해집니다.
이런 상대적으로 낙후된 삶을 살아가던 여진족에 고려에서 온 김준, 혹은 함보라는 승려가 여진족의 추장이 되면서 이들의 운명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여진이 세운 금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금사에서는 그들의 시조를 함보를 신라출신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고려사에서도 김준이라는 이름으로 여진족의 추장을 고려출신이라고 적고있는것을 보면 당시 사람들은 신라와 금나라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고 본듯 합니다. 그리고 후대의 여진족인 만주족이 편찬한 흠정만주원류고에서 금나라 국호를 신라와 연관지으면서 신라 김씨성을 본따 금이라는 국호를 정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후삼국 시기에 신라가 고려에 멸망하는 과정에서 생겨는 유민들이 북쪽으로 많이 올라갔다고 하는데, 아마 신라출신 함보역시 이런 상황에서 여진족의 땅으로 들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60이 넘은 나이에 여자에게 장가들어 자식을 낳았다고 하는데, 이들이 나중에 금나라를 세우는 완안씨이며, 완안이라는 성은 여진어로 왕을 뜻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이후 차츰 강성해지는 여진을 견제하기 위해 고려에서 윤관을 사령관으로 한 17만 대군이 파견되었지만, 결국 한창 기세를 올리던 여진에게 크게 공험진에서 패하고 소강상태로 접어듭니다. 길주성에서의 영웅적인 수성 사실도 전해지긴 하지만, 결국 고려로서는 당시 새로 개척한 동북 9성을 다시 여진에 돌려주었으며, 여진에서는 고려에 사신을 파견해 다시한번 고려에 고개숙이며 우선은 고려의 종주권을 확인시켜줬다고 합니다.
하지만 요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천조제는 자신들의 지배하에 있던 여진족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으며, 여러 부족장들을 불러다가 모욕을 주었다고 하는데 그 과정에서 완안부의 추장이었던 아골타가 요나라에 반발하며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러자 자칭 70만이라는 요나라군이 여진을 정벌하기 위해 출동하지만, 이상하게도 숫자가 크게 부족한 여진군이 거란군을 크게 격파하며 요나라는 멸망하게 되고 대륙의 패권을 여진족이 차지합니다.
금나라의 건국과 함께 그동안 부모의 나라로 대접하던 고려와의 관계도 변화가 생기는데, 당시 고려의 황제였던 예종은 여진에 너희들이 일어난 곳은 우리 고려의 땅이라는 모욕적인 국서를 보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거란과 싸우고 있던 여진으로서는 고려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며 큰 항의도 하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결국 천조제를 잡아 죽이고 요나라를 멸망시켰으며, 남쪽으로 송나라를 공격해 도성인 변량을 함락하고 휘종과 흠종 두 황제를 사로잡고 수많은 전리품을 얻는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송나라와의 전쟁에서 활약한 여진의 장수가 완안올출이라는 사람인데, 우리에게는 김올출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며 중국 곳곳에서 송나라와 싸운 이야기가 전해지는 인물입니다.
결국 금에게 굴복한 송나라는 막대한 재물을 바치면서 화친을 맺었고, 대산관부터 회수에 이르는 화북땅을 확보한 금나라가 동북아시아의 패자자리를 얻었습니다.
이후 고려와 사대관계를 맺기는 했지만 고려가 이전에 거란에 상실했던 보주성과 내원성을 획득하는 과정에 개입하지 않았고, 끝까지 고려와 따로 전쟁을 하지 않은것을 보면 확실히 금나라와 고려는 나름 친밀했던 사이로 보입니다.
그렇게 지배층은 신라의 유민들과 관련이 있고, 이들을 높은 자리에서 보좌한 것은 발해의 유민들이었으니 금나라는 최소한 우리 역사에 포함시켜도 큰 문제는 없어보입니다. 다만 금나라가 흔히 중원이라고 부르는 하남성과 섬서성까지 강역으로 가지고 있었으니 중국인들이 금나라와 고려의 친밀했던 관계와 우리역사와의 밀접한 관계를 인정하지 않을것으로 보이긴 합니다.
요나라를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금나라 태조 아골타는 여진과 발해는 원래 한 집안이라는 말로 각지의 발해 유민들을 포섭하여 요나라군과 싸웠습니다. 거기에 훗날 금나라의 폭군이라고 불리며 잔인한 살인과 폭정을 거듭한 희종황제와 해릉왕 역시 서하를 치고 남송과 전쟁하는 와중에도 따로 고려와 전쟁은 하지 않았고 오히려 다른 국가들보다 대접하는 분위기를 보여줬으니 금나라는 최소한 우리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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