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를 재통일한 수나라와 침략을 막아낸 고구려

2022. 10. 21. 13:50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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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8년, 수나라의 50만 군대는 남조를 멸망시키기위해 다시한번 강남으로 진군합니다.

이미 예전부터 북조에서 남쪽에 웅거하고 있는 남조를 공격한 적이 있지만, 그럴때마다 기라성같은 장군들이 등장하여 북조군을 깨뜨리고 강남의 평화를 지켰기 때문에 이번에도 진나라의 황제인 진숙보는 별다른 수비는커녕 후비들과 놀아나는 전형적인 암군의 모습만 보여주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진나라의 모든 수비전선이 무너지고, 결국 도성인 건강성에 입성한 수나라군은 빈 우물안에 숨은 진숙보와 후비들을 발견하여 북방의 장안으로 이들을 압송하고 맙니다. 이후 수나라군은 남쪽에 더이상 왕조가 생겨나지 않기위해 그동안 도읍이었던 건강성을 철저히 때려부수어 폐허로 만들고, 각지에서 저항하는 진나라군을 제압하여 결국 300여년의 혼란을 무마하며 다시한번 중국을 통일했습니다.

 

외손자에게 황제자리를 빼앗은 양견은 이런 찬탈자라는 비난을 듣지 않았던지 굉장히 의욕적으로 국가경영에 열심이었다고 합니다. 이 시기에 변경을 소란스럽게 하는 외적들을 토벌했으며, 몇년동안 사회가 안정되며 풍년이 지속적으로 이어져 몇년동안 조세를 받지 않아도 국가수입에 문제가 없을만큼 거대한 부를 축적하게 됩니다.

이때를 개황의 치라고 부르며, 비록 북주를 찬탈한 인간이기는 했지만 워낙 능력있는 인물이었던 양견이 정말 어떤 왕조도 이룩하지 못했던 안정과 번영을 가져온 정치였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다만 이 시기에 고구려는 상당히 힘든 시기로 전해집니다.

장수태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문자명태왕 시기에는 부여의 남은 무리들이 귀부하여 영토는 넓어지긴 했지만, 점차 고구려의 패권에 금이 가고 있었고 그 후에 안장태왕이 즉위하며 잠깐 안정된 시간을 보내긴 했지만 이후 안원태왕 말기에는 태왕자리를 놓고 세군과 추군파로 나뉜 귀족들이 서로 세력싸움을 하여 2천여명이 죽어나갔다고 전해지니, 이때가 가장 고구려 역사상 어지러웠던 시기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고구려가 어지러울때 남쪽의 신라와 백제가 연합하여 고구려를 침공하여 영토를 빼앗아갔으며 서북쪽에서는 돌궐이 쳐들어와 변경을 어지럽혔다고 하니 정말 그 당시가 고구려에 큰 시련의 시기였음을 알수 있습니다.

 

거기에 서쪽에서는 북방에서 서로 북제와 북주로 갈려 싸우던 선비족이 북주 무제의 통치하에 다시한번 통합되었고, 그 기세를 몰아 고구려를 공격해왔지만 우리에게 바보온달로 유명한 온달이 선봉으로 나서 북주군을 크게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하지만 승기를 타고 북주를 다시 공격하지 않아 북주가 회복할수 있는 시간을 주었으며, 이런 북주를 찬탈하여 수나라를 세운 양견이 다시한번 중국땅을 통일하고 만 것입니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수나라였기 때문에 다시한번 고구려와 충돌하는 것은 불가피했습니다.

수나라가 먼저 고구려를 공격하기 전에 영양태왕이 먼저 말갈기병을 동원하여 임유관 일대를 초토화시키는 작전을 펼쳐 선제공격을 한 이후, 고구려를 침공하지만 전염병이 돌고 폭풍을 만나 별다른 소득없이 퇴각했다는 기사가 전해질 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아마 참패를 가리기 위한 꼼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수나라군이 진군한 시기는 태풍이 올 시기가 아니었고, 강이식 장군이 이끄는 고구려군에게 참패했다는 우리측 기록도 있는만큼 수나라가 당시 보기드문 참패를 당한것에 좀더 무게가 실리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수나라 문제가 대단했던 것은, 이런 참패를 당했으면 다시한번 이를 갈면서 복수전을 준비할만도 하지만 이후에는 전쟁을 이어가지 않고 내치에 주력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나라에서 이룩한 전성기인 문경지치보다 더욱 칭송받는 정치를 할수 있었는데, 후계자를 잘못 세운 관계로 아들인 양광에게 살해당하고 수나라의 짧은 전성기는 막을 내리고 맙니다.

 

그래도 다음 황제로 등극한 양광은 우리에게 폭군의 대명사인 수 양제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즉위한 직후에는 상당히 정상적인 정치를 폈으며, 사방을 공격하여 수나라의 판도를 크게 늘렸고 그동안 줄곧 눌려있던 돌궐을 정벌하는 한편 서역의 토욕혼까지 토벌해 수나라의 이름을 크게 알렸습니다.

거기에 수도인 대흥성을 내버려두고, 동쪽의 낙양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여 동도라 이름짓는 한편 남북을 연결하는 대운하를 건설하여 백성들에게 큰 고통을 주게 됩니다.

그렇지만 당시 남조가 개발한 강남지방은 이미 북방의 경제력을 압도하고 있었고, 정치의 중심지인 북방으로 물자를 수송하기 위한 운하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양제는 운하를 건설했으며 여러가지 토목공사를 일으켜 백성들에게 큰 고통을 준 것입니다.

 

이렇게 아버지인 문제가 쌓아놓은 재산을 거덜낸 것으로 보이는 양제이지만, 나중에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서는 가운데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군이 낙양에 있던 식량창고인 낙구창을 점령했을때는 그곳에 있던 식량을 먹어치우고 백성들에게 나눠주어도 고갈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으니 수나라때 축적해놓은 재산이 정말 어마어마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거기에 한참 후인 당 태종시기에도 정관의 치라는 전성기를 맞이한 당나라조차 예전 수나라 문제시기의 인구와 재력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고 평할 정도였으니, 생각외로 수나라의 국력은 가늠조차 할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던 모양입니다.

 

이후 양제는 고구려를 굴복시키기위해 100만대군을 동원했지만 실패하고, 이후에도 계속하여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이번에는 각지에서 일어나는 반란때문에 실패합니다. 그래도 2차 침입을 교훈삼아 3차 침입때는 상당히 고구려에 큰 타격을 주었고, 고구려의 비사성까지 함락시켜 영양태왕이 긴장했다고 전해지니 이후의 침입은 성과가 전혀 없던것은 아니었나봅니다. 다만 양현감을 비롯한 내부에서 반란이 잇따르고 북방이 혼란스러워지니 수나라가 스스로 철수한 것입니다.

 

이렇게 철수한 양제는 혼란한 북방을 내버려두고 풍요로운 남쪽으로 내려갔으며, 남쪽에 새로운 수도인 강도를 건설하고 북방을 잃는한이 있어도 남쪽에서 버틸 생각을 했지만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부하들의 손에 의해 살해당합니다.

결국 수도인 대흥성을 점령하고 주도권을 잡은 이연에 의해 수나라는 멸망하고 새로운 왕조인 당나라가 들어섰으니, 고구려가 천하를 통일한 수나라를 망하게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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