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남조 양나라 불패의 장군 진경지

2022. 9. 30. 15:34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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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남북으로 갈라져 싸우던 남북조 시기에는 이민족이 통치하던 북조의 무력이 좀더 강했습니다.

강족과 저족, 선비족이 통치하던 북조들의 군사력이 막강했기 때문에 남조에서는 방어하는데 급급했고, 국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남조로서는 그저 간헐적인 북벌을 실시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북방 이민족의 침입을 받아 낙양과 장안을 빼앗기고 밀려는 남조였기 때문에, 북벌은 공허한 구호이긴 했지만 피할수 없는 목표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동진의 권신이었던 환온과 유유는 북벌을 감행하여 잠시동안 이민족에게 넘어갔던 장안과 낙양을 탈환하기도 했고, 이것을 바탕으로 유유는 기존의 동진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유송왕조를 세우게 됩니다.

 

하지만 유송왕조는 곧바로 황족들간의 다툼으로 혼란에 빠졌고, 소도성이 이끄는 새로운 세력이 남제를 건국하여 대신하지만 이곳 역시 황족간에 반목과 살인이 일어나 더욱 큰 혼란에 빠졌으며 30년도 되지 않는 남제의 존속기간동안 유송왕조의 60년에 맞먹는 엽기적인 행각이 일어난 것입니다.

결국 옹주자사였던 방계황족인 소연이 다시 정변을 일으켜 수도인 건강을 점령하고, 양위를 받아 새로운 국가인 양왕조를 건립합니다. 이 양나라는 백제와 교류하면서 우리 역사와도 인연이 깊은데, 공주에 있는 무령왕릉이 당시 양나라의 영향을 받아 건축되었다는 점이 유명합니다.

 

양나라의 군주가 된 소연은 그동안의 정치를 일소하고 새로운 정치를 폈으며, 그렇게 남조에 거듭 나타난 폭군들과는 달리 괜찮은 정치를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다만 당시 남조의 사회풍조가 현실에 안주하고 가진것을 지키려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에, 사회가 안정되긴 했지만 눈에 띌만한 공적을 가진 무장들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 와중에 큰 공을 세웠던, 소연을 예전부터 보좌하던 시종 출신의 장군이 바로 진경지입니다.

진경지는 말타고 직접 칼을 휘두르며 싸우는 방식의 장군은 아니었고, 후방에서 작전을 세우고 통솔하는 대장군에 가까운 타입이었으며 소연의 각별한 신임을 받는 측근이었기 때문에 이런 벼락출세를 하게 된 것입니다.

대부분 역사를 돌아보면 이런 신임받는 측근이 출세하여 군대를 지휘하게 되면 주로 군대를 제대로 통솔하지 못해 싸움에 크게 지고 달아나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 일반적인데도, 진경지는 뭔가 다른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당시 북방에서 패권을 잡고있던 북위였지만, 당시에는 북위의 6진에서 큰 반란이 일어나 국력을 크게 소진한 상태였고 선비족이 한족화되면서 이전의 거친 풍속을 잃어버리고 급속히 쇠퇴하던 시기였습니다.

북위의 서주자사 원법승이 반란을 일으켜 양나라에 항복하자, 진경지는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여 북위군을 물리치고 무사히 팽성일대를 접수하게 됩니다.

그 후에 이곳을 노려 다시 침입한 북위군에게 양나라군이 참패하지만 진경지만은 패하지 않고 군대를 보존하여 무사히 물러나 새로운 방어선을 형성하여 소연의 칭찬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후 양나라의 북벌과정에 참여한 진경지는 양나라의 다른 장수들이 점령하지 못한 수양성을 점령하였고, 이 과정에서 52개의 요새를 쳐부수고 7만여명의 포로를 잡았다고 하니 당시 양나라로서는 큰 승리를 거두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진경지의 인생에서 가장 큰 공로는 이후 이어진 북벌에 있습니다.

당시 북위의 실권자였던 이주씨의 횡포를 견디지 못하고 북위의 황족인 원호가 양나라에 항복해왔는데, 양나라에서는 그를 새로운 북위의 황제로 삼기위해 진경지에게 7천명의 병사를 주어 북상시킵니다. 당시 북위가 쇠퇴하긴 했어도 군사강국이라 너무 적은 병력을 북상시킨 느낌이 있는데, 아마 북벌이 실패해도 큰 타격이 되지 않을 정도로 소규모의 군대를 보낸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진경지는 이렇게 적은 병사를 이끌고 북상하여 곳곳에서 북위군을 크게 무찌릅니다.

북위의 수도였던 낙양 근처 형양성을 뻬앗지 못하고 고전하는 상태에서 수도를 방어하기 위한 북위군 30만이 모여들어 이들을 포위했는데, 결국은 이 싸움에서 이기고 견고하기로 이름난 형양성을 함락시켜 낙양근처로 바로 진군합니다.

낙양근방 호뢰관까지 접근하여 점령하자 결국 북위정권은 낙양에서 도망쳤고, 진경지와 원호는 낙양으로 입성하여 새로운 황제로 원호를 세웠으니 진경지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시기를 보내게 된 것입니다.

진경지가 당시 출정하여 140일동안 32개의 성을 함락하고 47회의 전투를 모두 이겼다고 하니, 당시 그의 능력을 충분히 알수 있습니다.

 

하지만 북위의 황제가 된 원호는 진경지를 경계하기 시작했고, 북위의 실권자였던 이주영이 북방의 정예군을 모아 남하하고 있었으며 남쪽의 양나라에서도 원군을 보내지 않아 진경지는 사방으로 적들에게 포위됩니다.

그 과정에서 이주영의 주력군을 격파하고 밀어내긴 했지만 중과부적으로 낙양이 함락되었고, 포위된채 외롭게 싸우던 진경지는 모든 병력을 잃어버리고 승려로 변장하여 겨우 남쪽으로 혼자 탈출하는데 성공합니다. 무패장군이라는 그의 신화가 이렇게 깨져버리고 말았지만, 소연의 측근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상을 받고 식읍을 하사받는 등 처벌은 전혀 받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눈부신 전공을 세운 덕분인지, 이후 그의 삶은 그렇게 눈에 띄지는 않습니다.

한동안 전장에 나가지 않던 진경지는 양 무제 소연의 명으로 후방에서 일어난 반란을 제압하고 난 후에 다시 전공을 세우며 북방에서 침입해온 북위의 후경군을 크게 격파하여 다시한번 이름을 널리 알린 후 539년 병으로 사망합니다.

이후 양나라는 항복해온 후경이 일으킨 반란으로 수도인 건강이 함락되면서 궤멸적인 타격을 입는데, 만약 진경지가 그때까지 살아있었다면 후경의 반란군을 조기에 진압하고 오히려 당시 동서로 갈라져 싸우고 있던 북위군을 이기도 다시한번 낙양을 점령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진경지는 미천한 시종출신이었지만,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군을 이끌어 북벌에서 낙양을 점령하고 북위의 정예군을 여러번 격파하는 전공을 올렸습니다. 당시 북위군을 거의 전멸시키고 수많은 포로를 잡았으며 양나라가 북벌에 투자한 자금의 몇십배 이상의 금은보화를 얻어 양나라로 보냈다고 하니 그 누구도 하지 못한 큰 전과를 올렸다고 봐도 될듯 합니다.

다만 북방의 기병들에 포위되어 적당한 시기에 후퇴하지 못하고 고립된 상황에서 한순간에 모든 북벌군을 잃어버리는 패배를 하고 말았으니, 그점만이 그의 일생에서 유일한 오점이라고 하겠습니다.

다만 황제의 큰 신임을 받았어도 평생 검소하게 살았으며 북방에서 활동할때 어떤 유명한 장군이나 천군만마가 있어도 그의 군대가 입은 흰옷을 발견하면 달아나기 바빴다고 하니, 허약한 군사력을 가진 남조가 배출한 큰 전공을 세운 장군인것은 부인할수 없는 사실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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